[시/에세이] 내가 선택한 일터, 싱가포르에서(임효진)

프로필

2023. 8. 8. 10:09

이웃추가

<내가 선택한 일터, 싱가포르에서>

Oh, I'm an alien, I'm a legal alien

I'm an Englishman in New York

Oh, I'm an alien, I'm a legal alien

I'm an Englishman in New York

Sting, <Englishman in New York> 中

제대로 된 해외여행을 간 적이 손에 꼽는 나는 늘 어떠한 경험이 나를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AWS에서 일하시는 선배님의 강연에 인용된 책이었는데, 강연을 듣고 외국계 기업에 이끌렸던 것 같다. 한국에서의 경험과 다른 경험을 하고 싶다면, 한국의 조직문화를 벗어나 다른 세계를 보고 싶다면 외국계 기업에 취업해 그 나라에 사는 것이 좋아 보이지만 지금의 환경을 벗어나 무작정 외국계 기업으로 향하는 것이 정답은 아닌 것 같았다. 행복하게 일을 할 때가 있었던 저자 역시 자신이 살던 곳을 벗어나 타국에서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황량한 것인지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일본에는 일본인보다 한국인이 많다고 하고 동남아 여행을 가면 관광객이 더 많다고는 하지만 그 나라에서 잠깐 문화를 즐기는 것과 돈을 벌고 생계를 꾸려나가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싱가포르 속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준비가 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싱가포르에서는 ‘그 일을 잘 해낼 사람’을 뽑는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 업무를 해낼 수 있는 사람보다는 ‘우리 사람’이 될 사람을 뽑는다.

능력보다는 우리 조직에 잘 어울리는 사람, 잘 적응하는 사람을 선호하는 편이다.

(중략...)

일 잘 하는 사람을 최고로 치는 싱가포르에서는, 일을 잘 한다는 것은 회사와 개인이 맺은 ‘계약’을 충실히 이행한다는 뜻이다.

<내가 선택한 일터, 싱가포르에서> 259-261/391 中

작가는 자신이 겪어 온 한국 직장 문화와 싱가포르의 조직 문화를 비교한다. 이 책의 절반 이상이 그러한 내용이다. 직접적인 비교가 거슬릴 수 있고, '내 회사는 안 그런데?'(나 역시 이전에 인턴한 회사들은 싱가포르의 문화를 꽤 닮아 있었다.) 라 생각할 수는 있지만 우리나라 직장 문화와 외국계 직장 문화는 꽤 다를 테니 별 수 없다. 개인적인 생각에서는 한국의 직장보다 외국계 직장이 더 칼 같은 느낌이었다. 일로 만난 사이니까 더 이상 일로 만날 필요가 없으면 칼같이 헤어지는 사이. 내가 떠남으로써 회사가 후임을 구하느라 시간을 쓰거나 할 수는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내 알 바는 아니다. 이렇게 시간이나 일과가 기반이 되는 게 아니라 업무 그 자체가 회사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는 게 머릿속으로 그려온 회사의 모습이긴 하다. 그러나 한국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입장으로서는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딱딱 떨어지는 일이라고 해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인데 칼로 무 자르듯 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러나 싱가포르에서는 임신이나 출산 등으로 인한 경력단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나에게 천국처럼 보인다. 개인에게 주어진 업무만 잘 마치면 일과 가정생활을 병행하는 것이 무리가 없으니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고 나서도 개인의 커리어를 내려놓지 않아도 된다. 한국에서 '우리 사람'이 된다는 것은 직장이 우선순위가 높다는 것일까.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위해서라면 내려놓을, 때로는 그래야 할 것이 많기도 하다. 그러나 싱가포르에서는 일과 개인의 양립을 인정한다. 나는 내가 인턴생활을 한 회사를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도 점차 나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일을 회사에서 잘 해내면 회사 밖의 개인 역시 오롯이 존재할 수 있도록.

아시아 사람들이 윗사람에게 순종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나한테, 아니 회사에서 그럴 필요는 없어. 그건 집에서 해.

네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나에게 말해. 그게 서로에게 좋은 거야.

<내가 선택한 일터, 싱가포르에서> 202/391p 中

<내가 선택한 일터, 싱가포르>를 읽고 나와 다른 책 속 배경에도 쉽고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작가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와 직장 생활의 시간과 경험이 DNA에 녹아 있다고 할까. 특히 상사나 업무 관계자에게 의견을 말하기 망설이다가 스스로 뻘쭘해하는 모습을 보고는 '와, 나도 이럴 듯' 하는 안타까움이 생기기도 했다. 입을 열지 않아 과묵한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작가의 말을 듣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은 성과를 거둬도 국제적인 경쟁력을 좀처럼 얻지 못하는 것은 이런 문화의 영향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타인이 보기에도 그랬겠지만 작가 스스로도 얼마나 답답하고 자존감이 매 순간 깎여나갔을지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렇기에 작가에게 건넨 상사의 저 조언이 단호해 보이지만 새삼 따뜻하게 느껴졌다. 어쨌든 나라는 사람을 조직의 일원으로서 존중하고 솔직한 생각을 듣고 싶어 하는 거니까 말이다. 지금의 직장도 예전보다 낫다고 하지만 직장 생활에는 늘 수많은 관계가 꼬리를 문다. 상사, 클라이언트, 거래처, 고객, 심지어 동료까지. 관계에는 항상 감정 노동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비위를 맞추거나 성과를 얻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많다. 나이가 어리거나 직급이 낮을수록 말을 한 마디 얹으면 그렇게 눈치를 보아야 한다. 이는 직장뿐만 아니라 학교, 그리고 기타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이다. K-유교 사회를 겪어온 이들이 보면 상사와 디자인 시안에 대해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일이 결코 흔한 것은 아닐 것 같다. 이해관계가 다를 수 있고, 그렇기에 자신의 의견을 강력히 피력해야 할 때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논쟁의 당사자 모두 일을 잘 해내고 싶고 더 좋은 결과물로 성과를 얻고 싶은 마음에서 논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위 문단과 연결해 생각해 볼 때 우리나라는 '우리 함께 뭉쳐서 잘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똘똘 뭉친다면 싱가포르에서는 '일하려고 뭉쳤으니 잘 해보자!'란 사고방식이 주인 것 같다. 둘 중 정답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싱가포르에서 내 나이, 경험, 직급에 따라 자기검열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부럽다.

Don’t burn the bridge.

혹시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다리를 태우지 말라고?

회사를 그만둘 때 이제 안 볼 사이라고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는 뜻이다.

<내가 선택한 일터, 싱가포르에서> 102/391p 中

그럼에도 싱가포르와 한국의 직장이 공유하는 한 가지 불문율이 있었다. 마무리를 아름답게 하라는 것. 한국에서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아직 경험을 못 해봤는데 책에서 전 직장에게서 직원의 평판을 조회하거나 직장이 추천서를 써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매 순간 조직은 나를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학교생활도 평가, 인간관계도 평가, 직장 생활도 평가라니. 어쩌면 이렇게 일 외적으로도 신경 쓸 것이 많은 게 직장 생활이니 작가의 회사에서는 '다른 건 다른 거고 일단 일부터 똑바로 해.'라는 가치관이 자리 잡은 걸까? 일단 분명한 것은 나와 연결된 공간에 작별을 고하고 새 출발을 시작하는 것이니 머문 자리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 예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직장과 동료들에 대한 예의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곳으로 나아갈 나에 대한 예의를 다하는 것이기도 하다. 반은 장난, 반은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퇴사 짤은 반드시 퇴사하고 사용해야겠다.

영화 <엘리멘탈>의 버니와 엠버, 파이어플레이스(출처: Disney Animation Promos 트위터)

버니가 파이어 랜드에 있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엘리멘탈 시티에서 새 여정을 시작했듯 작가는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으로 싱가포르를 선택했다. 영어가 되는 아시아 국가라는 이유도 있지만 독자로서 책을 들여다보면 그곳의 모든 토양이 작가에게 양질의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인 것 같다. 타국에 나와 있으면 외롭고 황량한 마음에 파이어타운을 벗어나지 않은 버니처럼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을 찾거나 한국어, 한국 음식 등 익숙한 것에 집착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엠버처럼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택했다. 한국 회사 대신 로컬 회사를 택하고 그곳의 모든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 자신의 삶을 일구어내기 위한 치열함일 것이다. 한국에서 일하든 외국에서 일하든 정답은 없겠다만 자신이 성장할 곳, 자신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 언제, 어디에 있든 나를 잃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기억해야겠다.


💼 작가 임효진(사라)의 브런치 💼

김민쩡
김민쩡 일상·생각

⭐책, 영화, 공연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좋아해요. ❌ 광고성 계정은 서로이웃 받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