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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02 / Day 11-24
파란빛깔의 호수과 붉은 돌의 조화
Day 20 비 내리는 길 위에서 깨달은 '자연'
캐빈 안에 있는 나무 난로에 어제 도착하자마자 불을 지핀 덕분인지, 밤새 침낭도 덮지 않고 잤을 만큼 훈훈했다. AT의 Shelter 처럼 쥐들이 사람 몸 위로 대담하게 뛰어다니지도 않았고, 그저 구석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정겹게 들려왔다. 눈을 뜨자마자 하늘부터 살폈다. 역시나 비가 내리고 있다.
문득 이 비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비구름보다 빨리 움직여 그 범위를 벗어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캐빈에서 잔 덕분에 장비들은 뽀송뽀송하다. 젖은 건 신발뿐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양말을 신지 않고 맨발로 신발을 신는다. AT종주 때부터 종종 써온 방식인데, 비 오는 날에는 이만한 방법이 없다. 다음 날 아침 눅눅하게 젖은 양말을 안 신어도 되고, 어차피 젖을 발이라 생각하니 물을 피해 요리조리 다니지 않고 거침 없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제와 오늘 지나는 구간은 원래 물이 귀한 지역이다. 그런데 이렇게 비가 내려주니 목말랐던 나무와 풀들이 환하게 웃고 있는 것 같다. "너희들이 좋으면 됐다." 한마디 건네고는 다시 속도를 높였다. 우리는 이 거대한 대자연에 잠시 들른 '방문객'일 뿐이라는 사실을 늘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결코 자연을 넘어설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을 깨닫고 이 경이로운 풍경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느냐, 아니면 훼손하느냐의 차이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自然)의 뜻처럼, 인간의 간섭 없이 있는 그대로 두는 것 이상의 보존은 없다.
노스캐스캐이드 산맥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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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21 낡은 신발을 벗고 다시 마을의 품으로
어젯밤, 캠프사이트에는 먼저 도착하신 어르신 네 분이 모닥불을 피워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뒤늦게 도착해 텐트를 치는 내게 그분들이 다가와 PCT종주자냐고 물으셨다. 그렇다고 답하니 신기한 듯 몰려들어 내 장비들을 살피기 시작하셨다. 특히 트레킹 폴 하나로 세우는 내 초경량 쉘터가 꽤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바닥도, 내부 메시 텐트도 없는 단순한 피라미드형 구조였으니, 일반 캠핑 텐트에 익숙한 분들 눈에는 제법 낯설어 보였을 것이다.한 할아버지는 본인은 내일 집으로 돌아가신다며 마시다 남은 브랜디 병을 툭 건네주셨다. 뜻밖의 득템이다!
축축한 기운이 감도는 아침이었지만, 일찍 일어나 모닝 파이어를 피워주신 어르신 덕분에 따뜻한 온기를 품고 기분 좋게 출발할 수 있었다. 오늘의 목표는 '화이트 패스(White Pass)'. 그곳 주유소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 음식 박스와 무엇보다 간절했던 새 신발이 도착해 있었다. 새 신발을 신겠다는 일념 하나로 부지런히 걸어 해가 질 즈음 목적지에 닿았다.
주유소 근처 숙소는 하이커들이 머물기엔 가격이 너무 비쌌다. 주인아줌마는 약 32km 떨어진 '팩우드(Packwood)'라는 마을을 추천해 주었다. 다시 길가에 서서 엄지를 들었지만, 이번 히치하이킹은 유독 힘들었다. 거의 한 시간이나 걸렸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이유가 있었다. 등 뒤로 해가 지고 있었던 탓에 운전자 입장에서는 내 웃는 얼굴 대신 검은 실루엣만 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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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다가 손에 쥔 트레킹 폴은 어둠 속에서 거대한 칼처럼 보였을지도 모르니, 선뜻 차를 세우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결국 차를 세워준 구원자는 빨간 머리에 코걸이와 입술걸이를 한 쌍둥이 딸을 뒷좌석에 태운 젊은 아빠였다. 그는 무척 친절했다. 마을로 가는 길에 있는 멋진 뷰포인트들을 하나하나 구경시켜 주는 여유까지 부려주었다. 마을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 내게 그는 복숭아 하나를 쥐여주며, 근처 빵집을 가리켰다. "저기서 꼭 커피 한 잔 마셔요." 낯선 하이커에게 건넨 그 짧은 조언과 달콤한 복숭아 향기가 팩우드의 첫인상이 되었다.
긴 기다림 끝에 날 태워준 빨간머리 구원자
Day 24 신들이 거처하는 정원을 걷는 법
새벽 5시, 텐트를 때리는 강렬한 바람 소리에 눈을 떴다. 밖은 이미 환했다. 정신을 차리고 텐트 밖으로 나선 순간, 내가 기가 막힌 곳에 자리 잡았음을 깨달았다. 해발 2,130m. 내 눈앞에는 종주 전체를 통틀어 'Top 3' 안에 들 법한 장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레이니어 산과 애덤스 산이 동시에 눈에 들어오고, 일출 전 산의 색조가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이리저리 카메라 셔터를 눌러보지만, 화면은 이 압도적인 풍경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 갈 길은 바쁜데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련은 남지만, 너무 사랑하기에 다음 길로 떠나는 이 마음을 자연도 알아주리라 믿으며 6시 반에 길을 나섰다. 계속되는 내리막길마다 탄성을 자아내는 캠프사이트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텐트 안에서 장애물 없이 거대한 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명당들마다 하이커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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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걷는데, 이번에는 설산을 배경으로 투명한 계곡이 흐르고, 다음 굽이를 돌면 또 다른 절경이 나를 멈춰 세웠다. 알고 보니 지금 내가 지나는 구간은 워싱턴주에서도 평소에 워낙 붐비기로 유명한 섹션이었다.
산 주변을 빙 돌아가는 트레일은 굽이마다 새로운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여기서도 감탄, 저기서도 감탄. 도대체 나더러 어쩌라는 건지 모를 정도로 풍경이 집요하게 나를 붙들었다. 결국 결심했다. 매일 이런 뷰를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니, 오늘은 진도 나가는 걸 포기하고 이 아름다움을 충분히 누리기로. 오늘 못 간 거리는 다른 날 만회하면 그만이니까.
경치가 조금 단조로워지는 호수 구간에 들어서자 다시 속도를 높였다. 길이 너무 쉽고 평탄해지니 오히려 몸이 처지고 꾸벅꾸벅 졸음이 쏟아지기도 했다. 결코 투덜거리는 게 아니다. 그만큼 트레일이 하이커를 편안하게 품어주고 있다는 뜻이다. 길 위에서 7명의 NOBO를 만났는데, 그중 두 명이 나를 알아보고는 "혹시 솔라 아니냐"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심지어 작년 AT종주 중 나를 만났던 구체적인 장소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이거 원, 나 트레일 위의 유명인인가? 하하하.
기분 좋은 만남과 눈부신 풍경 덕에 하루가 짧게 느껴졌다. 이제 워싱턴주의 끝자락이 160km(100마일)도 채 남지 않았다.
SOBO 동료들과 마을에서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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