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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없는 눈이 초。이 맞지 않는 세상을 바라봤다. 거칠게 부러진 나무의 밑동은 만들다 버려진 작품 같았고 회색 눈이 내린 것처럼 색을 잃어버린 숲은, 내 기억 속에서도 색을 빼앗아가는 듯했다. 그 색 없는 길을 걸어가는 길, 발은 추위에 떨 듯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가족들을 데리고 이 길을 뛰어내려갔던 게 벌써 3년 전 일이라는 사실은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 3년 사이 평온했던 현실이 침묵으로 변해버렸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3년 전의 하루는 시작이 달랐다. 감고 있던 눈 위로 내려앉던 시작의 햇살, 귓속으로 울려퍼지던 시작의 새소리. 그러나 그날 내 눈에 내려앉는 것은 똑같은 옷, 똑같은 모자를 입고 있는 낯선 사람들이 지른 불길이었고, 내 귀를 울린 것은 지진 소리 같은 폭발음이었다.
아버지의 다급한 목소리와 투박한 손길이 그 시작 속 유일한 이정표였다. 여러 발의 천둥소리가 지나가고 그 이정표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난 이미 이정표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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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든 군인들에게서 낯설기만 한 사투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는 또 다른 이정표가 되어 날 더 멀리 뛰어가게 했다.
길가에는 추억이 날 향해 손 흔들고 있었다. 동생과 함께 올랐던 아름드리나무는 새까맣게 탄 밑동을 보이고 있었고 함께 애지중지하던 사과나무는 가지가 다 부러진 채 잿빛 잎들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나 혼자 다른 세상에 있는 걸까. 마을로, 집으로 다가갈수록 달라진 내 기억에 차마 다가갈 마음이 나지 않았다. 기억 속에 남은 장소들을 볼 수 없었다. 원래 그랬던 것인지, 내 기억이 바뀐 것인지, 마을 입구의 장승도, 나만 보면 오줌을 갈기던 개도, 늘 장독대에서 고추장을 잔뜩 떠주던 할머니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집은 그 자리에 있었다. 이것마저 내 왜곡이 아닐까 싶었지만, 집만은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다가갈수록 달라지는 기억에 난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 무너진 지붕과 구멍난 담벼락, 도둑이라도 든 꼴로 역시 색을 잃어버린 채 그 자리에 서있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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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을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용기는 애초에 남아 있지 않았다.
마당에는 누군가 주저앉았다. 익숙했다. 하지만 역시 낯설었다. 새로 생긴 흉터들. 잔뜩 떡져 번들거리는 머리카락, 거지가 입을 것 같은 옷. 남이 되어버린 것 같은 그 여자에게 동생이라고 물을 용기 역시 없었다.
돌담을 넘어 집안으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너진 돌담이 경계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그 경계를 넘어가지 못했다. 어린 시절 했던 약속을 중얼거리는 동생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집에서 웃으며 만나자고 말하던 그 얼굴도 이미 사라진 기억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동생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릴 때 내 머리카락은 흔들리지 않았다. 정처없이 마당을 걷는 동생의 발이 흙 위에 자국을 남길 때도, 돌아본 내 걸어온 길 위는 바람이 남긴 자국뿐이었다. 바람에 날아온 회색 나뭇잎이 날 뚫고 날아갔다. 나와 마주친 동생의 눈은 내게 초.을 맞추지 못했다. 어쩌면 기억이 아닌, 세상이 아닌 내가 사라진 것일까? 그러면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난 그렇게 경계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눈처럼 포근한 햇빛을 받으며 천천히 그 아래 덮여갔다.
#동생 #김유정 #백일장 #최우수상 #산문
다. 정처없이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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