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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성원성 작성일26-10-21 15:59 조회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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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원 목사
로마 초기 그리스도교 카타콤의 벽감묘. 지하 암반을 파서 만든 무덤이 통로 양쪽에 층층이 이어져 있다. 신분과 재력을 넘어 부활의 소망을 나누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장례 문화를 보여준다.
“갈릴리 사람들의 나그네 환대와 죽은 자의 무덤을 돌보는 정성이 그들 세력을 키운 까닭이 아닌가. 저들은 자기편 가난한 자뿐 아니라 우리 편 가난한 자까지 먹여 살린다.”
절대 권력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재위 361~363)의 서한이다. 이교 사제 아르사키우스에게 썼다. 황제는 ‘배교자’로 불렸다. 그는 옛 로마 다신교를 부흥시키려 안간힘을 썼다. 신전을 보수하고 화려한 제사를 올렸다. 옛 신들은 답이 없었다. 돌아선 민심은 붙잡지 못했다. 황제가 주목한 것은 자신이 경멸하던 ‘갈릴리 사람들’의 사랑이었다.
편지는 단순한 탄식이 아니었다. 위기감에 쫓긴 다급한 질타이자 개혁 지침이었다. 황제는 이교 사제들에게 그리스도인의 구호 활동을 본받으라고 거칠게 촉구했다. 제국의 절대 권력자가 모방하려 했던 것은 군대가 아니었다. 정교한 교리도 아니었다. 가난한 자를 먹이고 나그네를 품는 일이었다. 버려진 주검의 무덤을 돌보는 헌신이었다.
로마의 장례 문화는 신분과 재력에 따라 갈렸다. 부유한 귀족은 거대한 석관과 화려한 행렬로 가문의 권세를 과시했다. 반면 가난한 자는 장례다운 장례를 보장받지 못했다. 공화정 시대에는 성 밖 공동 구덩이에 빈민의 시신이 짐승 사체와 함께 버려졌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왔으나 장례는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그 불평등한 죽음의 세계에 교회가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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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의 견고한 신분 질서에 맞선 영적 반란이었다. 세상은 고인의 재산과 가문을 물었다. 교회는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존엄을 보았다.(창 1:27)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과 자유인의 차별이 무너졌다.(갈 3:28)
지하 묘소 카타콤의 바위벽을 파낸 작은 무덤이 마련되었다. 이름 없는 가난한 성도와 노예도 존엄한 안식의 자리를 얻었다. 로마는 장례로 신분을 과시했다. 초대교회는 장례로 인간 존엄을 선언했다.
3세기 알렉산드리아에 치명적인 역병이 덮쳤을 때다. 감염 공포 앞에서 사람들은 병든 가족마저 버리고 달아났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은 목숨을 걸고 환자 곁을 지켰다. 숨진 이들의 시신을 거두어 씻겼다. 정성껏 장사 지냈다. 당시 감독 디오니시우스가 남긴 증언이다.
그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에 닿아 있다. 아리마대 요셉은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의 몸을 거두었다. 세마포로 감싸 새 무덤에 모셨다.(마 27:57~60) 세상이 죄인으로 낙인찍은 주검을 끝까지 품은 사랑이었다. 절망의 돌무덤에서 부활의 새벽이 열렸다. 그리스도인에게 장례는 끝난 생명을 처리하는 절차가 아니다. 다시 살아날 부활 생명을 선언하는 믿음의 고백이었다.
믿음은 공동체 책임으로 자라났다. 2세기 말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교회 헌금이 빈민의 장례와 고아, 노인을 위해 쓰였다고 했다. 가난해도 존엄하게 떠날 수 있었다. 혈육이 없어도 마지막 길을 배웅할 신앙 가족이 곁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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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아누스 황제가 뼈아프게 인정한 것도 이 사랑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성도뿐 아니라 다른 신을 섬기는 이교도 빈민까지 거두었다. 교회는 죽어서도 버림받지 않는 사랑의 공동체였다.
1700년이 흐른 오늘, 로마의 무덤가에서 시작된 질문이 한국교회 심장을 겨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장례 문화를 만들고 있는가. 화려한 빈소 면적과 산더미 같은 플라스틱 조화가 고인의 무게를 매기고 있지는 않은가. 교회의 장례마저 직분과 재력에 따라 달라지고 있지는 않은가. 유력자의 빈소에는 발길이 넘치면서 가난하고 이름 없는 성도의 마지막 길은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고독사와 무연고 사망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시대다. 평생을 외롭게 살다 홀로 숨을 거두는 이들이 해마다 늘어간다. 교회가 회복할 본질이 있다. 세상이 외면한 죽음을 끝까지 품는 긍휼이다. 혈육이 없어도 마지막 길을 눈물로 배웅할 사람이 곁에 서 있어야 한다. 장례의 품격은 넘쳐나는 조문객이나 호화로운 의전에 있지 않다. 마지막까지 지켜낸 존엄의 깊이로 결정된다.
초대교회가 로마에 던진 장례 폭탄에는 화약 대신 사랑이 담겨 있었다. 비명 대신 기도가 울렸다. 파괴 대신 존엄이 살아났다. 제국의 황제마저 고개 숙이고 모방하려 했던 사랑이었다.
이제 한국교회는 다시 무덤가로 내려가야 한다. 아무도 찾지 않는 빈소를 지키고, 이름 없는 주검의 가족이 되어주어야 한다. 살아서 외로웠던 사람이 죽어서까지 버림받지 않도록 끌어안아야 한다. 가장 위대한 설교는 화려한 강단에서만 울려 퍼지지 않는다. 세상이 외면한 차가운 무덤가에서도 선포된다. 초대교회가 로마에 던진 그 장례 폭탄을, 오늘 한국교회가 다시 던져야 한다.
회는 하나님 형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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