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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성원성 작성일26-10-20 21:37 조회1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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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글은 십수 년 동안 내 안에 품어온 고민이자 질문이다. 대한민국에서 살아오며 줄곧 마주했던 풍경에 대한 이야기다.
북한 주민을 돕자고 했더니 '좌빨'이 됐다. 한국에 와서 24년을 살았지만 정치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진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물론 정착 초기부터 총선과 대선 때마다 후보들을 나름대로 살펴보고 국민으로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는 일은 놓치지 않았다. 다만 국민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 내가 정치적 낙인을 경험하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 단체에서 활동하면서부터였다. 북한 주민을 돕자고 했다.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북한을 돕는다'는 말 자체가 문제였다. 어느 순간 나는 '좌빨'이라는 낙인이 찍힌 사람이 되어 있었다.
비판할 사람이 없어도 비판해야 했던 사회
▲ 북한을 비판하면서 북한을 닮아가는 모습 국회든 어디든 조직내에서 서로 다름을 수용하지 못하고 비판만 하는 모습
북한에서는 어려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조직생활을 한다. 그 조직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생활총화'다. 생활총화는 먼저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는 '자아비판'으로 시작한다. 다음에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호상비판'을 해야 한다. 비판의 기준도 정해져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교시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 기준에서 무엇을 잘못했는지 따지는 것이다.
문제는 비판할 일이 없어도 비판해야 한다는 。이다. 어떤 때는 마땅히 비판할 친구가 없어 미리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이번에 내가 너를 호상비판할 테니 마음 상해하지 마라." 더 심각한 문제가 생기면 '사상투쟁회' 무대에 세워져 여러 사람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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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비판은 개인의 자유로운 판단보다 조직과 국가의 체계에 의해 요구되는 행위였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함께 고민하기보다 정해진 기준에 따라 잘못을 찾아내야 했다. 때로는 비판하는 행위 자체가 조직에 충실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이 되었다.
그런 사회를 떠나 대한민국에 왔다. 이곳에서는 잘못된 정책을 비판할 수 있고,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비판할 수도 있다. 북한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회다.
그런데 이상했다. 누군가의 말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편을 가르고, 생각이 다르면 낙인을 찍고,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사실인지조차 확인하지 않는 모습들이 낯설지 않았다.
북한에서는 비판이 충성을 증명하는 수단이었다. 대한민국에서는 권력을 견제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수단이어야 한다. 그런데 왜 이곳에서도 비판은 상대를 공격하고 낙인찍는 도구가 되는가.
북한의 독재를 비판하면서 닮아가는 사람들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북한선교 현장에서 마주한 일부 사람들의 태도였다. 북한선교라는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면서 북한 정권이 무너지기를 간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북한의 독재와 인권탄압을 비판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 역시 북한 체제의 문제를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북한을 향한 기도가 어느 순간 적대감과 심판의 언어로 채워졌다. 북한 주민을 어떻게 살릴 것인지보다 북한 정권을 어떻게 무너뜨릴 것인지에 더 큰 관심을 두는 듯했다. '멸공'을 외치는 목소리는 컸지만, 그 안에서 사람을 향한 사랑과 연민을 발견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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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그들은 북한 정권이 무너지는 것이 북한 주민들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기독교의 중심에 사랑과 용서, 화해가 있다고 배웠다. 정의와 사랑은 함께 가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북한을 향한 정의를 이야기하면서 정작 사랑과 화해는 뒤로 밀려나는 모습을 보았다.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북한의 위정자들을 심판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북한 정권의 잘못을 비판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그 비판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고 싶은 것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비판인가. 아니면 상대를 무너뜨리는 데서 만족을 얻는 비판인가.
비판하는 대상의 모습을 닮는다는 것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자신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 문장이 떠오르는 요즘이다. 북한 매체에서 남한을 비난할 때 사용하는 언어를 생각해본다. 상대의 정책이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기보다 모욕적인 표현과 조롱, 거친 언어를 앞세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상대를 설득하려는 말이라기보다 적대감을 드러내고 자기편을 결집하려는 말에 가깝다.
그런데 최근 대한민국 정치권에서도 비슷한 언어를 발견한다. 지난 7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국민의힘 박충권 의원은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북향민'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데 항의하며, 이를 정정하지 않으면 장관을 '북한 대변인' 또는 '북동영 장관'이라고 부르겠다고 말했다.
박 의원이 '북향민'이라는 호칭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 의사를 밝힐 수 있다. 그러나 왜 상대의 이름을 비틀어 조롱해야 하는가. 장관의 표현이 잘못됐다면 그 이유를 설명하고 반박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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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대변인'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 과연 정책을 검증하는 국정감사의 언어인가.
최근 일부 정치인들의 발언을 접할 때마다 북한 당국의 선전매체에서 들었던 공격적인 어투가 겹쳐 보이는 이유다. 물론 북한의 국가 주도 선전과 대한민국 국회의원의 발언은 같은 것이 아니다. 북한에서는 국가가 언론과 정치적 발언을 통제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정치인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그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내가 닮았다고 말하는 것은 정치체제가 아니다. 상대를 대하는 언어와 태도다.
비판이 아니라 공격만 남는 정치
오랜 시간 이념적 공격을 경험했던 나는 정치권에서 고성이 오가고 서로를 비난하는 모습을 볼 때면 텔레비전을 끄고 싶어질 때가 많다.
정치에서 비판은 반드시 필요하다. 권력을 견제하고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더 자극적인 말을 했는지, 누가 상대를 더 심하게 몰아붙였는지가 뉴스가 되는 모습을 자주 본다. 정작 무엇이 문제였고, 어떤 해결책이 나왔는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북한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북한의 방식까지 닮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북한의 독재와 억압을 비판할수록 우리가 보여줘야 할 것은 더 나은 언어와 태도여야 하지 않을까.
상대가 틀렸다고 생각하면 근거를 들어 반박하면 된다. 잘못한 일이 있으면 책임을 물으면 된다. 그러나 상대를 조롱하고 낙인찍는다고 자신의 주장이 더 옳아지는 것은 아니다.
언제쯤 우리 정치에서도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잘한 일에는 진영을 넘어 박수를 보내고, 서로 다른 의견에서 배울 것을 찾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소통이 되는 대한민국 국회를 정말 보고싶다.
북한을 비판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이 우리에게서 배울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이다.
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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