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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과거에 대한 최종 판결을 내려야만 정치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예술의 정치적 힘은 정답의 독.이 아니라 기억과 판단의 질서를 질문에 부치는 데서 생긴다
그 질문을 적의 징표로 바꾸는 순간, 우린 예술을 통해 함께 생각할 기회를 잃는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내가 사는 포르투갈에서는 아직 이 영화를 볼 기회가 없어 아쉽다. 따라서 작품의 완성도나 개별 장면의 의미를 판단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주목하는 .은 영화를 둘러싼 논쟁, 특히 작품에 대한 비판이 배우 개인을 향한 공격으로까지 번지는 현상이다. 영화의 배경이 된 1974년은 해외에 있던 나에게도 격동의 시기였으며 저항의 경험으로 남아 있다. 반세기 전의 사건을 둘러싸고 되살아난 한국 사회의 갈등은 예술과 정치의 관계를 다시 묻게 한다.
1974년 8월15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맞아 그날 숨졌다. 공식 설명은 문세광이 쏜 총탄에 의한 사망이라는 것이다. 이후 사건의 경위와 배후를 둘러싸고 의문과 논쟁이 이어졌다. 다만 의문을 제기하는 것과 특정한 설명을 입증하는 것은 다르다. 역사적 주장에는 증거가 필요하고, 예술적 해석에는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성찰할 책임이 따른다.
역사영화는 사건을 기록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룬다. 확인된 사실을 선택하고 배열하며, 기록에 없는 대화와 감정으로 인물의 삶을 구성한다. 그 과정에서 상상력이 개입한다. 공식 설명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역사 왜곡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극영화라는 이유로 모든 역사적 비판을 면할 수도 없다. 이번 논쟁은 역사영화가 배후 관련 의혹을 어디까지 제시할 수 있으며, 그 의혹이 관객의 역사적 판단을 어떻게 이끄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영상은 과거를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느끼게 한다. 관객은 대사가 허구임을 알면서도 인물의 표정과 목소리를 통해 사건을 기억할 수 있다. 그 생생함은 기록만으로 전하기 어려운 삶의 무게를 드러내지만, 추정을 확인된 사실처럼 느끼게 할 수도 있다. 역사영화의 힘과 책임은 이처럼 같은 자리에서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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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작품의 의도와 제작의 근거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설명만이 영화의 의미를 최종적으로 결정하지는 않는다. 관객은 제작자가 예상하지 못한 의미를 발견하고, 작품이 의도와 다른 효과를 낳는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창작자가 자신의 의도를 설명할 자유와 관객이 그것을 넘어 해석할 자유는 보장돼야 한다.
문제는 해석의 충돌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가에 있다. 보도에 따르면 주연 배우 유해진의 집 앞에서 영화 상영 중단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주진우 국민의힘 의원은 그의 외모를 두고 ‘북한상’이라는 댓글까지 남겼다. 작품의 역사 인식에 관한 논박이 배우의 외모와 일상에 대한 공격으로 옮겨간 것이다. 여기서는 어떤 장면이 왜 잘못됐는지보다 누구를 적대의 대상으로 지목할지가 앞선다.
이 대목에서 프랑스 작가 스탕달이 <라신과 셰익스피어>에 소개한 일화가 떠오른다. 그의 서술에 따르면 1822년 미국 볼티모어의 극장에서 경비를 서던 병사가 <오텔로>를 보다가 데스데모나의 죽음을 막겠다며 오텔로 역의 배우에게 총을 쐈다. 흑인이 백인 여성을 죽이는 것을 눈앞에서 허용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스탕달은 무대에서 벌어지는 일을 현실로 믿는 ‘연극적 환상’을 설명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이 병사와 오늘날 배우를 공격하는 사람들을 그대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 병사는 무대 위 사건을 현실로 착각했지만, 오늘날의 공격은 배우의 작품 참여를 정치적 동조로 단정한다. 경위는 다르지만 작품에 대한 적대감을 배우에게 옮긴다는 .에서 두 장면은 닿아 있다. 더욱이 스탕달의 일화에서 병사를 움직인 것은 단순한 몰입만이 아니라 인종적 편견이었다. 그는 자신이 믿는 세계의 질서를 무대에서도 지키려 했다. 오늘날 배우의 얼굴에 정치적 낙인을 찍는 행위 역시 작품을 검토하기 전에 이미 정해놓은 적과 동지의 구분으로 사람을 분류한다.
예술의 정치적 작동 과정도 중요
그러나 배우에게 정치적 낙인을 찍는 일을 비판하는 것만으로 예술과 정치의 관계가 충분히 설명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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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가 예술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더해, 예술 자체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작동하는지도 물어야 한다. 예술은 사회 밖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구의 경험을 이야기로 삼고 어떤 기억을 남길 것인지 결정하는 과정에는 이미 가치 판단이 들어 있다. 누구에게 말할 기회를 주고 누구를 침묵하게 하는가. 누구의 죽음은 오래 바라보고 누구의 고통은 배경으로 넘기는가. 정치적 구호가 없는 작품에서도 이러한 선택은 이뤄진다.
프랑스 영화감독 장뤼크 고다르는 ‘정치적 영화를 만드는 것’과 ‘영화를 정치적으로 만드는 것’을 구별했다. 그는 1970년 선언문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서로 대립하는 방식으로 제시했다. 혁명적 실천을 강조하던 당시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정치적 사건을 소재로 삼는 것만으로 영화의 정치성이 설명되지 않는다는 지적은 되새길 만하다. 권력을 비판하는 영화에서도 누구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누구를 배경으로 밀어내는지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영화가 무엇을 주장하는지만큼 그 주장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도 중요해진다. 카메라는 누구의 얼굴에 오래 머무는가. 누구의 말 다음에 누구의 침묵을 보여주는가. 같은 대사라도 어떤 장면 뒤에 놓이는지, 어떤 음악이 흐르는지에 따라 관객에게 다르게 다가온다. 관객은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판단을 이끄는 이런 선택들을 되짚어볼 수 있다.
논쟁의 질문 핵심은 해석권의 주체
역사영화의 정치성도 배후를 누구로 지목하는가에만 있지 않다. 권력의 발표를 전달하는 사람과 거기에 의문을 품는 사람 중 누구의 시선으로 사건을 보여주는가에도 있다. 따라서 비평은 대사와 줄거리뿐 아니라 표현 방식의 효과도 따져야 한다. 영화가 질문을 열어놓는지, 아니면 질문하는 형식을 빌려 하나의 답을 사실처럼 받아들이게 하는지도 중요한 비평의 대상이다.
창작의 자유와 비판의 자유는 이 지。에서 서로를 필요로 한다. 창작자는 논쟁적인 해석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관객은 그 해석의 빈틈과 편향을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작품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모두 검열자로 몰아붙이면 비평의 공간이 좁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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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대로 불편한 해석을 내놓았다는 이유로 창작자와 배우의 일상을 압박하면 표현의 공간이 위축된다. 배우도 작품 선택이나 자신의 공적 발언에 관해 비판받을 수 있다. 그러나 배역을 맡았다는 사실만으로 그 인물과 같은 신념을 가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책임을 묻더라도 그 사람이 실제로 한 말과 행위에 근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배우는 낯선 인물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일 자체를 피하게 된다. 배우의 얼굴에서 사상을 감별하려는 순간, 작품을 읽는 비평은 사람을 가려내는 심문으로 변한다.
이러한 낙인이 반복되면 창작자는 표현하기 전에 공격의 가능성부터 계산하게 된다. 예술의 다양성은 공개적인 금지 없이도 줄어들 수 있다. 비판의 자유가 타인을 침묵시키는 힘으로 바뀌는 순간, 그 자유의 근거도 흔들린다.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쟁이 던지는 질문은 결국 과거를 해석할 권한을 누가 갖는가이다. 국가의 공식 기록은 중요한 근거지만 질문을 끝내는 명령은 아니다. 영화의 상상력은 새로운 시선을 제공하지만 역사적 입증을 대신하지 않는다. 관객의 기억과 감정도 존중돼야 하지만 다른 해석을 침묵시킬 권한은 없다. 어느 누구도 과거의 의미를 독.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모든 해석이 똑같이 타당한 것도 아니다. 서로의 해석을 증거와 비판에 열어놓을 때 과거를 이해하는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공동 과제가 된다.
그 공동의 작업이 반드시 하나의 결론으로 끝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확인됐고 무엇이 아직 의문으로 남아 있는지, 어디서부터 서로의 판단이 갈리는지를 분명히 하는 것만으로도 토론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예술은 때로 기록을 읽는 사람들만의 논의를 더 많은 이의 질문으로 넓힌다.
예술이 과거에 대한 최종 판결을 내려야만 정치적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어온 것을 낯설게 보게 하고,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며, 판단의 근거를 함께 검토하도록 이끌 수 있다. 예술의 정치적 힘은 정답을 독.하는 데서가 아니라 익숙한 기억과 판단의 질서를 질문에 부치는 데서 생긴다. 그 질문을 적의 징표로 바꾸는 순간, 우리는 예술을 통해 함께 생각할 기회를 잃는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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