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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신' 본문 일부. 창비 제공
"한 때 어른들도 숨바꼭질을 하였다. 어른들의 숨바꼭질도 술래에게 발각되면 죽었다. 하지만 어른들의 숨바꼭질은 아이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어른들의 숨바꼭질에서 죽은 자는 다시 술래가 되지 못했다."(117쪽) "아짐이 반란군헌티 삶은 감자 준 거 내가 다 안당께. 아니라고 우겨도 소용없어. 내가 다 봤응께."(344쪽)
군인이 겨눈 총부리가 한 마을을 통째로 잡아먹을 듯 과장되게 그려진 장면의 데자뷔처럼, 배신자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줌인 돼 면을 가득 채운다. 그 끝에 서 있는 이는 주인공 상아의 큰고모지만, 그 자리에 누구를 세워 놓든 이야기 전개에 무리는 없다. 역사에서 희생자들은 "흰 신을 신었다는 이유로,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그곳에 산다는 이유로, 특별한 이유도 없이 지목되어" 총살당했으니까.
개인의 목소리를 통해 시대의 아픔을 조명하는 김금숙 작가의 신작 그래픽노블 '흰 신'이 출간됐다. 일본군 위안부('풀'), 조선 최초의 여성 볼셰비키('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제주 4·3사건('지슬'), 6·25전쟁 이산가족('기다림')에 이어 여순항쟁을 다뤘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 병사들이 제주 4·3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키자, 이승만 정부가 여수와 순천 지역에 대한민국 최초의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흰 신' 본문 일부. 창비 제공
이야기는 상아 모녀의 대화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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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떠돌이 장사꾼에게 속아 산 값싼 검은 구두를 딴은 '새 신'이라며 딸에게 들려 보내려 하지만, 상아는 자신의 오래된 흰 운동화를 찾는다. 이제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대입 선물로 사준 메이커 신발. 그런 그의 뜻을 거스르고 뛰어들었던 1990년대 학생운동의 소용돌이를 버텨준 신발이었다. "니 아부지가 제일 무서워했던 게 뭔지 아냐? 경찰서 가는 거였다. 그런디 니가 대학생 때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잖냐? 그때는 당장 가더라. 당신 딸이 맞아 죽기라도 할까봐 미친 듯이 가더라."(195쪽)
전남광주 고흥에서 나고 자란 상아 아버지 학기에게 여순항쟁은 죽마고우를 반란군 전선에 밀어 넣은 사건이자, 유일한 피붙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인이다. 다 해진 짚신을 신고 다니는 누나가 안쓰러워 흰 고무신을 선물로 들고 귀가한 그날, 토벌군은 당산나무 아래에 마을 사람을 모아 놓고 흰 신발 신은 이들을 '처형'했다. 봉기군 .령 당시 인민위원회가 신발공장에서 빼돌려 시민들에게 나눠준 흰 운동화를 부역과 동조의 표식으로 매도한 것. 흰 신발은 당시 누구나 흔히 신던 것이었고, 부역이란 실상 굶주리고 다친 이에게 베푼 선의에 불과했다.
상아와 학기의 삶이 교차하다가 마침내 "사랑하는 나의 딸아, 아들아. 바람에 흔들려도 어둠을 밝혔던 수많은 작은 촛불을 기억하기 바란다."(416쪽)는 속삭임으로 마무리되는 책은 김금숙 작가의 자전적 경험 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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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순천에서 열린 북토크에서 "왜 정작 고향에서 일어난 여순사건에 대해선 아직 작품을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언젠가 반드시 하겠노라"고 답했던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대신해 고흥 팔영산의 비극을 들려줄 생존자들을 찾아 나섰다. 상아의 가족사에 채 녹여내지 못한 증언은 책 말미에 따로 풀었다.
'흰 신' 본문 일부. 창비 제공
작품을 관통하는 또 다른 심상은 '원'이다. 1부 1장은 '일식'이란 제목을 달고 "10월 19일 오늘 오후 5시 이후 붉은 일식이 있을 예정"(13쪽)이라는 뉴스 앵커 발언으로 문을 연다. '달의 여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주인공 상아 근처로 유달리 둥근 스포트라이트가 자주 비치고, 총구의 동그란 입구와 총성 '탕'의 이응 받침도 강조된다.
김 작가는 15일 한국일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의도한 것이 맞다"고 말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것이 당연하고 모든 사람은 언젠가 죽는데 왜 인간은 공존하지 못하고 내 편 네 편을 가르는가, 사상이란 무엇인가, 왜 죄 없는 민간인들이 희생당하고 80년간 침묵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고민들이 큰 원 안에서 맴도는 것 같았어요."
영령과 공명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손과 발에 먹물을 묻혀 가며 작품을 그려낸 작가는 지난해 9월 아우슈비츠에서 또 다른 학살을 마주하고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고 고백한다. "죄 없이 희생된 사람들과 동물들, 자연의 넋을 추모합니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 살아생전 당신의 삶과 역사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아 죄송합니다."(459쪽)
흰 신·김금숙 지음·창비 발행·464쪽·2만4,000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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