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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유나유 작성일26-10-15 07:51 조회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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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젤엔진용 연료분사펌프를 생산하는 두원정공은 1974년 경기도 안성에 설립됐다. 51년 만인 2025년 12월26일 파산했다. 두원공과대학을 설립할 만큼 사세가 크던 때도 있지만 시대의 변화는 냉혹했다. 환경규제와 산업 전환의 파고를 넘지 못하면서 신규 채용과 기술개발이 끊겼다. 한때 2000명 가까이 일했던 안성 최대 중견기업에는 이제 3개월 단위로 계약하는 노동자 147명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회사는 망했지만 사람들은 아직 남아 있었다. 파산은 노동자들에게 공장이 문 닫는 시。을 결정할 권리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두원정공 노동자들은 조금 다른 길을 찾았다. 남은 주문을 끝까지 소화하고, 받을 수 있는 돈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고, 먼저 나갈 수 있는 사람이 후배에게 자리를 내주고, 떠난 사람의 일을 남은 사람이 배웠다. 언제까지 일할지 함께 의논하고 마지막까지 서로의 일을 책임졌다. 쫓겨나듯 공장을 떠나는 대신 자신들의 손으로 끝을 만들어가기 위해서였다. 회사의 파산을 막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노동자의 실패로 남겨두지 않으려 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학생 전인석은 이들 노동자의 이야기를 기록하기로 마음먹고 8월10일부터 21일까지 약 2주간 두원정공의 협조를 받아 노동자들과 함께 출퇴근했다. ‘망한’ 회사에 남은 노동자들과 어울리며 보고 들은 기록을 〈시사IN〉 지면에 싣는다. 8월20일 오전 윤진국씨가 출근 직후 오류 난 기계를 손보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기계 조작반에 기름때가 눌어붙어 있다. ⓒ시사IN 이명익 Error(에러). 월요일 아침, VE펌프 공장 안은 기계 소리와 기름 냄새로 가득했다. 가공라인 구석에 자리한 연삭기에는 세월이 눌어붙어 있었다. 흰 숫자 버튼은 누렇게 변했고, 절삭유가 튀어 말라붙은 자국이 곳곳에 얼룩을 남겼다.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도트 매트릭스식 표시창엔 빛이 거의 빠져 희미해진 。들이 모여 ‘에러’라는 글자를 간신히 만들어내고 있었다. “월요일 아침엔 이게 일이야.” 주말 이틀을 쉬고 나면 기계마다 오류가 났다. 연삭기 속 경고 문구를 본 윤진국은 출근하자마자 익숙하다는 듯 기계를 돌봤다. 기계 네 대를 차례로 돌며 유압을 켜고, 설정값을 다시 입력했다. ‘스타트’와 ‘스톱’ 버튼은 한 번에 누르지 않고 짧게 여러 번 번갈아 눌렀다. “처음부터 세게 누르면 장비들이 과부하가 걸릴 수 있어.” 늙어버린 기계는 나이에 맞는 작동법이 필요했다. 윤진국은 손전등을 들고 기계 속으로 들어가 연삭돌의 위치를 확인하고, 고장 난 이탈리아의 ‘마포스(Marposs)’ 측정기 대신 눈으로 연삭 정도를 체크한 뒤 미세한 소리 변화를 알아채 연삭기의 휠이 풀렸음을 감지해냈다. 35년 전 작성된 기계 사용법에는 적혀 있지 않은, 오랜 세월 기계를 다뤄온 노동자의 눈과 귀와 손에 밴 감각으로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윤진국은 1988년 8월9일 두원정공에 입사했다. 그가 담당하는 기계는 모두 4대다. 주야 교대근무를 하던 시절에는 5명이 맡았던 설비다. “예전만큼 생산량이 많지 않아 할 만해.” 여러 기계를 오가며 레일 위에 가공할 부품을 올리는 일을 그는 ‘밥’을 주는 일이라고 했다. 윤진국이 일하는 곳은 VE펌프 생산공장의 구동라인이다. 이곳에서 그는 연료분사펌프 안에서 회전력을 전달하는 ‘드라이브 샤프트’를 만든다. 부품은 연삭과 연마를 거쳐 조립라인으로 보내진다. 부품을 깎는 일만큼이나 기계를 가동 가능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도 그의 일이다. 20년 전 자동화라는 명목하에 여러 사람의 일자리를 대가로 들여온 ‘로봇’은 이제 애물단지가 되어 사람 손을 탔다. “로봇도 20년이 넘어서 사람이 만져줘야 해.” 아침에 맞춰놓은 설정값은 하루에도 여러 번 제멋대로 바뀌었다. 그때마다 다시 값을 맞춰야 했다. 한 번 고장 나면 반나절을 꼬박 수리에 매달리기도 했다. 오래된 설비일수록 기계의 상태를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같은 설비를 오랫동안 다뤄온 노동자가 아니면 고치기 어려운 고장도 많았다. 두원정공 노동자들이 휴게실에서 짧은 휴식을 취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오전 9시가 되자 윤진국은 기계에서 손을 떼고 휴게실로 향했다. 다른 라인에서 일하던 동료들도 약속이나 한 듯 삼삼오오 휴게실로 모여들었다. 아침 8시부터 한 시간 동안 기계를 。검하고 가동한 뒤 갖는 10분의 커피 타임. 노동자들이 아침에 서로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자며 자체적으로 만든 시간이었다. 오래된 형광등 아래 모여든 노동자들이 어제 본 뉴스부터 군대 시절 이야기, 자식들 이야기를 나눴다. 일찌감치 커피를 다 마신 몇몇은 벽을 따라 놓인 침상에 몸을 눕혔다 모바일 인터넷야마토게임 . 휴게실에 모인 얼굴은 수십 년째 거의 바뀌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신규 채용이 끊기면서 젊은 노동자가 들어오지 않았다. 스무 살, 서른 살에 만난 사람들이 같은 공장에서 함께 예순을 바라보게 됐다. “젊을 때는 쉬는 시간에 족구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다 눕고 퍼져.” 수십 년을 같은 공장에서 보낸 이들에게 나이 드는 일은 혼자 겪는 변화가 아니었다. 검은 머리가 희어지고, 쉬는 시간의 족구가 낮잠으로 바뀌는 동안 서로는 서로의 지난 시간을 곁에서 지켜봤다. 10분이 지나자 한 사람씩 몸을 일으켰다. 각자의 기계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안성 최대 중견기업의 마지막 147명 2026년 새해를 엿새 앞두고 파산 소식을 들은 노동자들은 담담했다. 그간 무성한 말과 침묵 속에서 각오했던 일이다. 2018년 한 차례 있던 파산 위기와 코로나19까지 견디며 버텨왔지만 역부족이었다. 질곡의 시간 속에서 회사가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른다는 불안은 일상이 됐다. 퇴직금을 받지 못할까 두려워 먼저 회사를 떠난 동료도 수백 명이었다. 147명은 그들을 다 떠나보내고 공장에 남은 사람들이었다. 8월21일 이기만 금속노조 두원정공지회 지회장이 간부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파산이 현실로 다가오자 이기만 금속노조 두원정공지회 지회장은 앞서 문을 닫은 사업장 사례를 찾아봤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지키기 위해 싸웠지만, 결국 일터를 떠나야 했다. 두원정공 노조는 고심했다. 지급받지 못한 퇴직금이 80억원가량 남아 있었고, 이미 계약한 납품 물량과 생산할 부품도 남아 있었다. 거래처가 있으니 퇴직금은 몰라도 월급은 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여전히 일할 곳이 필요한 노동자들이 있었다. 이기만은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파산을 막을 수 없다면 적어도 언제, 어떻게 떠날지는 노동자들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문제는 파산한 회사를 어떻게 계속 돌리느냐였다. 노동조합은 회사가 파산하기 전부터 파산 이후를 준비했다. 이기만은 파산을 앞두고 회생법원 판사를 찾아갔다. 파산 이후에도 운영을 계속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가까스로 3개월간 운영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회사 측에도 기존 거래처를 찾아가 거래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설득해달라고 요구했다. 현장에서는 노동자들에게 “회사의 파산이 노동자들의 실패가 아니다. 여전히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라며 공장을 위해 남아달라고 설득했다. 12월29일 월요일, 노동자들은 다시 공장으로 출근했다. 1965년생 한상국도 그중 한 명이다. 정년퇴직을 나흘 앞두고 파산을 맞았다. 1980년대 후반에 입사해 39년을 일했고, 퇴직금 6000만원이 남아 있었다. 퇴직금을 못 받을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처음에는 퇴사를 고민하기도 했다. 친구인 이기만과 윤진국이 그를 말렸다. 한상국은 결국 남는 쪽을 택했다. 그렇다고 그 선택이 옳았다고 확신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가는 게 잘하는 건지 남는 게 잘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그래도 51대 49로 남는 게 낫지 않을까….” 그것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었다.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조금 더 일해보자는 마음에 가깝다. 당장 일을 그만두면 받을 돈이 없지만, 공장에 나오면 한 달 400만원가량은 벌 수 있었다. 퇴직금 6000만원을 끝내 받지 못하더라도 1년을 더 일하면 그만큼의 손실을 조금은 메울 수 있다고 봤다. “대신 내가 일을 해야만 주는 거지만.” 한상국은 짧게 덧붙였다. 한상국이 일하는 곳은 조립라인의 러닝 공정이다. 조립을 마친 연료분사펌프를 러닝기에 넣고 일정 시간 작동시켜 누유 상태를 확인한다. 하루 생산량 440개를 맞추려면 아홉 대의 러닝기를 50회가량 돌려야 한다. 한상국이 이 일을 맡은 것은 회사에 남기로 결정한 지난해 말 무렵이었다. 원래 러닝 공정을 담당하던 노동자가 퇴직금을 받지 못할 것을 걱정해 회사를 떠나면서 자리가 비었다. 활동량이 많은 공정인 데다 모두가 새로운 일을 꺼려 아무도 선뜻 오지 않던 자리에 그가 자원했다. 39년 차 노동자도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한상국은 입사 뒤 20년 넘게 가공라인에서 일했다. 정년을 코앞에 둔 노동자가 파산을 앞둔 회사에서 새로운 일을 다시 배웠다. 사람이 빠져나간 자리를 남은 사람이 메우지 않으면 생산을 이어갈 수 없었다. 조립라인으로 옮겨 전동 임팩트 렌치로 볼트를 조이는 것부터 배워야 했다. 처음에는 볼트를 잘못 조여 기름이 새거나 터지기도 했다 릴게임신천지무료머니 . 한상국(왼쪽), 이원진 노동자가 조립라인에서 러닝 작업을 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한상국씨의 손. 왼손 엄지가 오른손보다 한 마디가량 짧다. ⓒ시사IN 이명익 한상국의 왼손 엄지는 오른손보다 한 마디가량 짧다. 한상국이 양손 엄지를 나란히 맞대 보였다. “그냥 보면 티 안 나. 대보면 짧지.” 4년 전 가공라인에서 일하다 당한 사고였다. 연마기에 끼인 부품을 꺼내려다 컨베이어벨트에 왼손이 말려 들어갔다. 잘린 엄지는 작업용 장갑 안에 남아 있었다. 동료가 장갑을 들고 응급실로 달려왔고 접합수술을 받았지만, 사흘 뒤 괴사가 우려돼 결국 일부를 잘라내야 했다. 사고 뒤 2년 동안은 겨울만 되면 손가락이 쑤셨다. 발가락 양말의 끝을 잘라 엄지에 씌우고 다녔다. 지금은 볼트를 조이는 일 정도를 제외하면 일상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다. 그러면서 그는 열아홉 살 때 잠시 일했던 구로공단 이야기를 꺼냈다. 한상국의 기억 속 그곳에는 열 손가락이 온전한 노동자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손가락 두 개만 남은 채 프레스를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기계 옆에서 일 안 하는 게 좋지, 웬만하면. 먹고살려니까 뭘 못해.” 두원정공에서 아내를 만났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동료 대신 나간 환인제약 직원들과의 5대 5 단체 미팅에서 지금 아내와 짝을 이뤘다. 동생들을 공부시키느라 모아둔 돈이 없던 한상국은 친구들에게 300만원을 빌려 200만원짜리 전셋집을 구하고 남은 100만원으로 혼수를 마련했다. 방 하나에 연탄을 때던 집이었고 그곳에서 몇 년간 신혼 생활을 했다. 회사에서 사원주택을 지어 입주자를 모집했다. 50명을 뽑는데 한상국의 순번은 50번 언저리였다. 앞 순번 사람들이 시내 신축 아파트를 분양받게 되면서 가까스로 차례가 돌아왔다. 16평짜리 아파트였다. “집이 대궐이야. 입주 첫날 잠이 안 와. 너무 좋아가지고.” 뒤늦게 대학 진학의 꿈도 이뤘다. 입사 10년쯤 지나 회사가 세운 두원공과대학교에 자동차학과가 생기자 야간 과정에 들어갔다. 퇴근하고 곧장 학교로 달려가도 수업에는 늘 늦었다. 과제를 하지 못한 날에는 사내 연구소 후배에게 도면을 뽑아달라 했고, 그 도면을 아내가 자를 대고 똑같이 그려주기도 했다. 평일에 학교를 다니느라 못한 잔업은 주말 특근과 철야로 메웠다. 그렇게 2년을 다녀 졸업장을 받았다. “내가 제대하고 직장 잡고 한 번을 안 움직였어. 정도 들었고, 애들 다 키우고 큰일들 치르고 다 회사에서 먹고살고 했으니까 고마운 회사야. 내 평생 청춘을 다 바쳤잖아.” 정년보다 파산이 먼저 왔다 한상국에게는 오래전부터 그려온 마지막 출근의 모습이 있다. 두원정공에서는 그간 정년을 맞는 노동자의 마지막 출근날이면 가족들이 공장으로 찾아오곤 했다. 자식과 손주들이 현수막을 만들어 들고 와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회사는 여행을 보내주거나 금을 선물하기도 했다. 자신에게도 언젠가 그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아들들에게 미리 부탁도 해뒀다. 그러나 한상국의 정년보다 회사의 파산이 먼저 찾아왔다. 이제는 퇴직 기념행사도 사라졌다. 한 달에 서른 명씩 신입사원이 들어오던 시절 입사한 그의 동기들도 단둘밖에 남지 않았다. “내가 마지막 소리를 듣게 생겼으니 안타까운 거지.” 또 다른 라인에서도 ‘마지막’을 실감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넓은 노즐 조립라인은 고요했다. 공정마다 줄지어 선 설비 수십 대 사이로 사람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강석원과 권영국, 둘뿐이다. 2년 전만 해도 20명 넘게 일했던 곳이다. 하루 2000개에 달하던 생산량은 500개 남짓으로 줄었다. 강석원씨가 노즐 압력을 맞추는 작업을 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두 사람은 오전과 오후, 서로 다른 공정을 오갔다. 오전에는 노즐의 압력을 맞추는 심 조정 작업을 하고, 오후에는 수정 러닝과 측정 작업을 했다. 권영국은 노즐 여섯 개를 한 손에 집어 기계에 차례로 꽂았다. 한 대가 돌아가는 사이 옆 기계에 노즐을 꽂고, 다시 그 옆 기계로 움직였다. 그렇게 기계 세 대가 동시에 돌아갔다.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바로 옆에서 하는 말도 알아듣기 힘들었다. 소음 탓에 노동자들이 꺼리던 공정이었다. 강석원은 그 옆에서 수정 작업을 하고 있었다. 노즐에 유압을 넣어 압력을 체크해 기준보다 낮게 나오면 노즐 안의 심을 갈아 끼워 다시 압력을 맞췄다.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심을 집는 그의 손은 노즐에 묻은 기름으로 번들거렸다. “장갑 끼면 일을 못해.” 강석원 역시 지난해 정년을 맞았다. 신천지무료 1988년 8월8일 입사해 38년 가까이 같은 라인에서 일했다. 같은 동작을 수십 년 반복한 몸에는 흔적이 남았다. 손목터널증후군으로 손목 수술을 받고, 무릎 수술도 앞두고 있었다. 하루 종일 서서 노즐을 검사할 때마다 테스터를 손으로 누르는 일을 반복한 탓이라고 했다. 이 라인에는 손목을 다쳐 산재로 나간 노동자도 많았다. 사람은 줄고 설비와 부품 사정도 나빠졌지만 강석원은 자신이 맡은 공정이 마지막 공정인 만큼 대충 넘길 수 없다고 했다. 그가 수정하고 검사를 마친 노즐은 완제품이 되어 공장을 떠난다. “내 손을 떠나면 차로 바로 들어가는 거잖아요.” 파산 뒤에는 15~20년 묵은 불용 재고까지 다시 꺼내 분해했다. 필요한 부품이 떨어지면 기존 부품을 변형해 대신 썼다. 오래 붙어 있던 부품을 떼어내는데 수술한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건져낸 부품으로 다시 압력을 맞추고 검사를 이어갔다. 강석원도 원래는 정년을 끝으로 공장을 떠날 생각이었다. 몸이 좋지 않아 한동안 쉬었다가 다른 일을 찾아볼 참이었다. 하지만 회사가 파산하면서 받지 못한 퇴직금이 발목을 잡았다. “다 노후 준비인데….” 파산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퇴직금만은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몸도 성하지 않고 받을 돈도 받지 못했지만 그는 다시 공장에 나왔다. 억울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그래도 남기로 한 것은 자신의 선택이라고 했다. “힘이 들더라도 일거리만 있으면 좋겠어.” 노즐 생산은 올해가 마지막이다. 내년이면 이 라인에서 만들 물량도 사라진다. 걱정되는 건 자신보다 젊은 후배들이었다. “나야 애들 다 키워놓았으니까 상관없는데, (자식들이) 이제 크기 시작한 애들은….” 넓은 노즐 조립라인에서 일하는 사람은 20명에서 2명으로 줄었다. ⓒ시사IN 이명익 강석원의 맞은편에서는 권영국이 기계 세 대를 오갔다. 권영국에게 파산은 유독 아픈 말이다. 2018년 두원정공이 첫 파산 위기를 맞았을 때 그는 노동조합 지회장이었다. 당시 파산 신청은 철회됐지만 그해에만 동료 148명이 퇴사했다. 권영국은 당시 상황을 씁쓸하게 떠올렸다. “사직서를 누가 언제 썼는지 아무도 모르잖아. 근데 하루는 보니까 .심시간도 아닌데 매.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더라고. (퇴사 전에) 외상값 정산하려고.” 이후에도 공장이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른다는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그때 노동조합이 붙든 것은 ‘회사를 살린다’는 말보다 일터를 지키는 일이었다고 권영국은 기억했다. “그때 가장 중요했던 거는 회사도 아니고 이 일터라는 거. 이걸 지켜야 사람들이 살 수 있겠다.” 회사가 어려워질 때마다 회사와 싸우는 방식으로는 일터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노조가 택한 것은 전면적인 투쟁 대신 일과 임금을 나누는 쪽이었다. 무급휴직을 하고 임금을 삭감하는 등 노동자의 몫을 줄이는 양보 교섭이 이어졌다. 회사와 상생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노동조합이 더 많은 몫을 요구하는 대신 가진 것을 내놓는 선택은 조합원들에게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집행부를 향한 비판도 거셌다. 그래도 방향을 바꿀 수는 없었다. 2018년 파산 철회 이후 월급은 한때 100만원 수준까지 내려갔다. 생계를 위해 퇴근 후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대리운전이나 물류센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버텼다. 그러면서도 공장에서는 끊임없이 생산량을 채웠다. 권영국은 당시를 “모두가 진짜 기를 쓰고 일했다”라고 기억했다. 회사는 이후 조금씩 매출을 회복했고, 2021년과 2022년에는 흑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물량은 계속 줄고, 신규 채용과 기술개발이 끊긴 공장은 조금씩 늙어갔다. 디젤엔진용 연료분사펌프가 만들어지기 전 모습. ⓒ시사IN 이명익 8월20일 두원정공 노동자가 마지막으로 납품하는 3기통 인젝터를 보여주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권영국은 오히려 파산이 결정된 뒤 남은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졌다고 했다. 마지막까지 남아 공장을 지키기 위해 한마음으로 모인 사람들 사이의 연대감과 정 때문이었다. 일터가 사라지는 것은 피할 수 없게 됐지만, 이들에게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그만두고 나갈 때 서로 웃으면서 나가는 거. 잘 살았다, 서로 격려하고. 사회에 나가서도 그 기운 가지고 또 살아나가는 거고.” 남은 물량을 만들고, 받을 수 있는 돈을 조금이라도 더 만들고, 각자 다음 삶을 준비하는 것. 권영국은 그것을 ‘공장 문을 잘 닫는 일’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닫을지 고민하다 보니 길이 보이더라고. 모두 망했다고 했을 때 난 다시 돌아와서 2년째 일하고 있어. 두원정공 올해까지 한다는데 내가 볼 땐 내년까지 가. 야마토 그러니까 욕심 부려서 무리한 요구 하면 같이 망하는 길이야. 함께하면 절대 안 망해. 약간 손해 보더라도 믿고 가봐. 힘들더라도 같이 가보자는 이야기지.” 두원정공이 문을 닫으면 두원정공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파산한 뒤에도 두원정공은 100개가 넘는 협력업체와 거래를 이어가고 있다. 두원정공에 부품을 납품해온 업체부터 생산에 필요한 각종 자재를 공급하는 업체까지 공장 하나의 생산을 위해 수많은 회사가 연결돼 있었다. 법원이 파산 직후 두원정공의 영업을 허가한 이유 중 하나도 협력업체의 연쇄 도산에 대한 우려였다. 생산을 즉시 중단할 경우 두원정공에 납품하기 위해 설비와 인력을 유지해온 협력업체들까지 경영난에 빠질 수 있었다. 올해 예순일곱인 강수구는 두원정공에서 일하는 노동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다. 1987년 3월6일 입사해 PE제조팀에서 정년 때까지 34년을 일했다. 연료분사펌프를 조립하는 공정 대부분을 거쳤다. 정년퇴직 뒤에는 다른 식품공장에 들어갔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해 수당까지 챙겨도 한 달에 손에 쥐는 돈은 200만원을 겨우 넘겼다. 그렇게 2년쯤 일했을 때 두원정공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구매팀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퇴직하며 빈자리가 생겼다. 생산에 필요한 부품과 자재를 발주하고, 생산계획에 맞춰 제때 현장에 공급하는 일이었다. 현장에서 평생 일한 강수구에게 구매는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그래도 회사는 그를 불렀다. “내가 부품들을 다 아니까 나한테 이 일을 맡긴 것 같어.” 구매팀에서 일하는 강수구씨는 생산에 필요한 부품과 자재를 발주하는 일을 맡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처음 구매팀에 왔을 때 강수구는 인수인계 내용을 모조리 수첩에 적었다. 앞으로 혼자 해야 할 일을 놓칠까 불안해서였다. 그가 책상에서 수첩 여러 권을 꺼내 펼쳐 보였다. 페이지마다 글씨가 빼곡했다. 형광펜으로 업무 이름을 표시하고, 해야 할 일에는 번호를 붙여 순서를 정리해뒀다. 지금도 모르는 일이 생기면 수첩부터 펼친다. “이거 없어지면 큰일 나.” 회사가 파산한 뒤 구매팀 일은 더 복잡해졌다. 예전에는 필요한 물건을 주문해 현장에 보내면 됐지만 이제는 돈도, 부품도, 거래할 업체도 넉넉하지 않았다. 더 이상 구하기 어려운 부품은 창고에 남은 재고를 뒤지고, 쓸 수 있는 것은 버리지 않고 다시 가공했다. 예전에는 현장에서 알아서 해결하던 부품의 기술적인 부분까지 구매팀이 해결해야 했다. 공장이 가난해질수록 오래 일한 사람의 경험이 필요했다. 어떤 부품을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있는지, 창고 어디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 어느 업체에 부탁해야 물건을 구할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어야 했다. 34년 동안 PE 펌프공장의 거의 모든 조립공정을 거친 강수구에게 구매는 낯선 일이었지만, 그가 평생 만져온 부품들은 낯설지 않았다. 팔 수 있는 것은 팔고, 쓸 수 있는 것은 다시 썼다. 그래도 창고에는 너무 많은 부품이 남아 있었다. 8월20일 생산을 끝낸 PE-PFR 펌프에 들어가는 부품은 여전히 16만 개가량 쌓여 있었다. 앞으로 10년은 더 만들 수 있는 양이었다. 주문이 계속 들어올 것이라 생각하고 준비해놓은 부품이었다. 하지만 거래처가 납품을 끊으면서 불용 재고가 되었다. 강수구는 쌓여 있는 부품을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계속 잘될 줄 알았으니까….” 잘될 것이라는 기대가 남긴 부품들 사이에서 공장은 이제 가진 것을 하나씩 소진하며 돌아갔다. 파산했다고 해서 다음 날부터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만들어 보내야 할 제품이 있었고, 받아야 할 돈이 있었고, 그 돈으로 임금과 퇴직금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두원정공이 하루 더 돌아가면 협력업체에도 하루치의 일이 남았다. ⓒ시사IN 이명익 기정서가 기계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하우징을 깎던 기계가 또 멈췄다. 절삭유가 고여 있는 기계 안으로 들어가 풀려버린 너트를 조이고, 에어건으로 안쪽에 쌓인 칩을 불어냈다. 때로는 물을 뿌려 내부를 씻었다. 기계 밖으로 나오자 머리카락과 작업복에 기름이 묻어 있었다. “더러우면 옷 한 번 버려주면 되지.” 기정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시 기계 앞에 섰다. 그가 일하는 곳은 VE펌프 공장의 하우징라인이다. 연료분사펌프 안의 부품들을 감싸고 지지하는 몸체를 깎는다. 하우징 안쪽을 절삭한 뒤 내경과 길이를 확인하는 것까지 그의 일이다. 0.1~0.2㎜의 차이에도 불량이 날 수 있어 가공을 마친 제품을 하나씩 살펴야 한다. 기름이 많이 튀고 위험해 사람들이 꺼리는 공정이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버티는 자들의 자부심 올해 예순다섯인 기정서는 1986년 2월18일 두원정공에 입사했다. 처음에는 노즐 공장에서 일하다 6개월 뒤 당시 막 지어진 VE펌프 공장으로 옮겼다 모바일 온라인야마토 . 설비도 다 들어오지 않아 노동자들이 텅 빈 공장 안에서 청소하고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고 때로는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보내던 시절이었다. 이후 30년 넘게 VE펌프 공장을 돌며 펌프에 들어가는 여러 부품을 두루 맡았다. 회사에서 인정을 받아 설비 운용을 배우러 일본에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새로운 설비를 개발할 때는 직접 공장에 찾아가 현장에서 필요한 부분을 자문했다. 오래된 기계는 수치만 보고 다룰 수 없었다. 기계로 측정했을 때 문제가 없어도 가공할 때 나는 소리가 평소보다 둔탁하면 곧 문제가 생겼다. 기정서는 기계의 소리를 듣고 다시 부품을 살폈다. 40년 가까이 같은 공장에서 일하며 몸으로 익힌 감각이었다. 기정서가 입사했을 때 막 생산을 시작한 VE펌프는 두원정공을 성장시킨 주력 제품이다. 하지만 자동차 산업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1990년대 이후 배기가스 규제가 강화되면서 기계식으로 연료를 분사하는 지금의 방식으로는 앞으로 버티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현장에서도 나왔다. 노동자들은 새로운 기술을 들여와야 한다고 회사에 요구했다. 두원정공도 다음 세대의 연료분사 기술을 준비했다. 매연을 대폭 줄이는 커먼레일 시스템 개발에 나섰다. 관련 설비에 수십억 원을 들였고 노동자들을 일본으로 보내 커먼레일 생산 방식을 배우게 했다. 기정서도 그중 한 명이었다. 당시 반장이던 그는 공정 책임자로 개발 과정에 참여했다. ⓒ시사IN 이명익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일본에서 배운 생산 방식을 그대로 한국 공장에 적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았다. 생산량을 맞추려면 노동강도를 크게 높여야 했고, 현장에서는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회사와 합의한 기획과 달라진 부분도 있었다. 개발은 몇 년 동안 이어졌지만 결국 전환에는 실패했다. 기정서는 40년 가까운 회사 생활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을 묻자 그때를 꼽았다. 커먼레일을 성공시키지 못한 것. 기정서는 전환 실패의 책임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죄책감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갖고 있었다. 과거에는 가공과 품질검사를 서로 다른 사람이 맡았지만 이제 기정서는 자신이 깎은 하우징의 품질까지 직접 확인했다. 다른 공정에서도 남은 사람들이 떠난 사람의 일을 하나씩 나눠 맡았다. 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량은 오히려 줄었다. “옛날에는 부서 간에 분업으로 일했는데, 파산하고 사람이 없으니까 알아서 자체적으로 품질 검증까지 다 하잖아. 그런데 오히려 지금 불량이 적어.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해. 그때는 불량 많이 났었는데….” 기정서씨(오른쪽)가 납품받은 물건을 검수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기정서는 누구보다 기계식 펌프의 끝을 알고 있었다. 30여 년 전부터 그 펌프를 만들어왔고, 그다음 기술인 커먼레일로 넘어가려다 실패하는 과정에도 참여했다. 그가 보기에 남은 시간은 길어야 1~2년이었다. “외부 요인을 우리가 막을 수는 없지만, 어찌 됐든 아직 고객이 있으니까. 공장이 멈추는 순간까지 우리는 최선을 다하는 거지.” 언젠가 마지막 주문이 들어올 것이다. 그 주문까지 생산하고 나면 기정서가 40년 가까이 돌려온 기계도 멈춘다. 그때가 언제일지는 알 수 없었다. 공장이 언제 끝날지를 결정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자신들의 잘못으로 그 끝을 앞당기지는 않는 것. 기정서가 말하는 ‘최선’은 그런 것이었다. 두원정공이 파산한 뒤 법원이 처음 허가한 영업 기간은 3개월이었다. 남아 있는 주문을 소화하고 공장을 정리하도록 부여된 시간이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나도 공장은 멈추지 않았다. 남은 노동자들은 예정된 물량을 만들어냈고 거래처와 협력업체도 거래를 이어가며 달마다 흑자를 기록했다. 법원의 허가도 두 차례 더 연장됐다. 그렇게 처음 3개월이면 끝날 줄 알았던 파산 공장은 9개월째 돌아가고 있다. 역설적으로 문을 잘 닫는 방법을 고민할수록 공장은 더 오래 돌아갔다. 윤진국의 바람은 하나다. “우리가 각자 입사한 날짜는 다르지만 퇴사하는 날짜는 같았으면 좋겠네.” 언젠가는 마지막 주문이 들어오고, 마지막 부품이 공장을 빠져나갈 것이다. 그날이 오면 윤진국이 월요일마다 오류를 잡아주던 연삭기도, 기정서가 소리만 듣고 상태를 알아채던 기계도 멈춘다. 노동자들은 그 날짜를 정할 수 없다. 기록적인 폭염이 지나간 뒤, 더위는 한풀 꺾이고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출근길에 공장 맞은편의 목련나무를 바라보던 기정서가 말했다. “목련 다시 피겠다.” 옆에서 듣던 동료는 이미 피었다 진 목련이 어떻게 다시 피느냐고 핀잔했다. 기정서는 그 말에 옅게 웃으며 공장 안으로 걸어갔다. 두원정공 노동자들이 퇴근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사람은 오전과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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