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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성원성 작성일26-10-09 04:58 조회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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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6일, 근로복지공단 통영지사는 한화오션 사내하청 업체에서 일하던 우즈베키스탄 여성 이주노동자의 적응장애를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했다. 필자는 이 사건을 지원하면서 이번 일이 특정 회사나 관리자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업장 변경을 제한하고 노동자를 사업주에게 종속시키는 고용허가제도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여성 이주노동자는 고용과 체류의 불안정성 속에서 성희롱·성폭력에 노출되더라도 쉽게 문제를 제기하거나 일터를 떠나기 어렵다. 어렵게 외부 기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해고와 고소, 보복성 괴롭힘이었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피해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자신의 경험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했다. ▲  지난 9월 13일 전국이주노동자대회에 참석한 사흐노자(오른쪽)와 거통고조선하청지회 강봉재 부지회장. ⓒ 김사부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사흐노자(URAEVA SHAKHNOZA NURULLAEVNA)예요. 2018년 4월 20일 E-9 비자로 한국에 왔어요. 첫 직장은 청주의 돼지고기 가공공장이었어요. 우리는 이슬람인이라 돼지고기를 먹지 않아요. 돼지를 만지는 것도 어려워 그곳에서 일하는 게 정신적으로 힘들었어요. 기숙사에서는 남녀 세 명이 방 하나를 함께 사용했어요. 회사를 나온 뒤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평택, 파주, 대구의 노동청을 찾아갔지만, 여성 이주노동자가 일할 곳이 없다고 했어요. 돈이 없어 터미널 의자에 앉아서 자고 화장실에서 몰래 씻으며 지냈어요. 그러다 조선소에서 사람을 많이 뽑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거제로 왔어요. 일이 힘들다고 했지만, 당시에는 이것저것 따질 처지가 아니었어요. 거제에 온 지 3일 만에 한화오션 사내 도장업체에 취직했어요. 처음 본 크레인과 아파트보다 큰 배가 무서웠고, 밀폐된 작업장에서는 페인트 냄새와 기계 소음이 계속됐어요. 어느 날 저는 오른쪽 새끼손가락 사이가 찢어져 두 바늘 꿰맸고, 함께 일하던 친구도 다리를 다쳤어요. 그러자 사장님은 우리에게 그만두라고 했어요. 친구는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갔지만 저는 계속 돈을 벌어야 했어요. 이후 자동용접 일을 하며 용접 흄과 분진에 노출된 채 일했고, 2023년 2월 10일 E-9 비자로 같은 회사에서 다시 일할 수 있게 됐어요. 2024년 12월 4일 사장님과 관리자는 일거리가 없어 월급이 100만 원밖에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며 다른 회사로 옮기라고 했어요. 당시 아들이 한국 유학비자를 준비하고 있어 사업장을 바꾸면 문제가 생길 수 있었어요. 월급을 100만 원만 받아도 좋으니, 아들이 한국에 올 때까지 일하게 해달라고 사정했어요. 당시 회사에서도 성희롱이 있었어요. 밤마다 전화하는 직원도 있었고, 어떤 관리자는 저에게 애인이 되자고 했어요. 거부하면 욕설과 괴롭힘으로 돌아왔어요. 고용에 문제가 생길까 봐 말하지 못했던 사실까지 사장님께 털어놓으며 사업장을 변경하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결국 회사를 옮기게 됐고, 아들의 유학 계획도 취소됐어요. 성희롱 거부에서 시작된 괴롭힘 새 회사에서도 성희롱이 있었지만, 고용을 유지하려면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반장도 처음에는 잘해줬지만, 다른 남자 동료들과 이야기하는 것까지 간섭하기 시작했어요. 2025년 8월 둘째 주쯤이었나, 。심시간에 휴게실에 있었는데 반장이 들어와 갑자기 제 가슴을 움켜쥐었어요. 너무 놀라고 무서워 반장을 밀쳐내고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숨죽여 울었어요. 동료들에게도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엄마가 아파서 운다고 둘러댔어요. 8월 16일 제 생일에는 밤 9시 45분쯤 반장에게 전화가 왔어요. 무서워서 받지 않고 다음 날 출근해서 이유를 묻자 "어제 남자랑 있었지? 남자들이랑 술 마셨지?"라고 다그쳤어요. 저는 "나는 술을 안 마셔요. 퇴근 후에는 제 개인 생활이니까 업무 외에는 이야기하지 마세요. 나는 여기 일하러 왔어요"라고 말했어요. 그 뒤부터 반장의 태도가 달라졌어요. 반장은 성행위를 암시하는 동작을 하거나 가운뎃손가락을 펴서 욕했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인신공격까지 했어요. 괴롭힘은 계속됐고 저는 집에 가면 울고 잠 못 이루는 날도 많았어요. 2025년 9월 8일에는 어지럽고 구토 증상이 있어 병원에 갔다가 쇼크 증상까지 생겨 119로 이송되기도 했어요. 그래도 일을 그만둘 순 없었어요. 비자 연장과 아들의 유학 문제 때문이었어요. 11월 4일 반장이 11월 말까지만 일하고 그만두라고 하자, 처음으로 상급 관리자에게 성희롱과 괴롭힘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어요. 이후 용접 장비를 둘러싼 갈등도 생겼어요. 반장은 제가 빌려준 장비를 가져가 돌려주지 않았고, 장비를 돌려달라고 하자 "100만 원을 물어내라", "다른 회사에 가서 몰래 훔쳐오라"라고도 했어요. 11월 28일에야 장비를 돌려받았어요. 반장은 '블랙리스트'를 언급하며 다른 조선소에도 못 가고 아들도 한국에 못 오게 할 수 있다고 했어요. 너무 무서웠지만 당시 회사가 아니면 1년 10개월 비자 연장이 어려웠기 때문에 참고 버티다, 12월 1일 외부 기관에 상담을 요청했어요. 회사는 다음 날 외부 기관에 왜 갔느냐고 추궁하더니, 12월 4일에는 제가 계약 연장을 위해 외부 기관에 거짓말한다는 식으로 몰아갔어요. 회사는 "힘들 테니 쉬라"며 사실상 해고 통보했어요. 12월 9일 출근하자 관리자는 "외부 기관에 신고해서 회사 이미지가 나빠졌다. 이제 같이 일 못 한다"라고 소리쳤어요. 제 설명을 듣지도 않고 계속 고함쳐 정신을 잃고 쓰러졌어요. 눈을 떠 보니 병원이었고 정신적 충격으로 우측 편마비 증상이 나타나 보름간 입원도 했어요. 아들의 유학이 물거품이 될까 봐 너무 절망스러웠고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어요. 제가 원했던 것은 특별한 게 아니에요. 비자가 허용하는 기간만큼은 고용 걱정 없이 일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병원에서 예전에 같은 공장에 있던 바뻐 오빠(거통고조선하청지회 강봉재 부지회장)가 생각났어요. 늘 바쁘게 움직여서 지은 별명이에요. 도움을 요청하자 다른 활동가(필자)와 함께 찾아왔어요. 녹음파일과 문자 내역 등을 확인한 뒤 노동부에 직장 내 성희롱·괴롭힘 신고하고 산재 신청도 하자고 했어요. 노동부 신고 후 언론에서 이 문제를 다루자, 회사는 가해자와 분리 조치하고 비자를 연장하는 조건으로 진정 취하를 제안했어요. 다른 선택지가 없어 이를 받아들였어요. 복직 전 부산의 대학병원 정신과에서 적응장애 진단과 '취업 치료 가능' 소견을 받아 산재를 신청했어요. 2월 26일 복직해서 일하던 중 4월 7일 경찰서 출석 조사 연락이 왔어요. 반장이 저를 무고죄로 고소했대요. 너무 무섭고 두려웠지만 다행히 혐의없음 처분을 받았어요. 그러나 반장은 그즈음부터 분리 조치 약속을 어기고 제가 일하는 곳에 찾아와 소리를 치거나, 용접 후 이름을 서명하는 곳에 다른 사람 이름을 적고 가는 등 보복성으로 괴롭혔어요. 사업장을 옮기려고 다른 회사에 연락하면 처음에는 채용해 주겠다고 했다가도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일자리가 없다고 했어요. 살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반장이 말했던 '블랙리스트'가 제 삶을 가로막는 것 같았어요. 혼자 들어간 질판위, 울면서 이야기했어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려던 중 6월 19일 근로복지공단에서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사건을 접수했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8월 21일 질판위 심의에 참석했어요. 활동가가 함께 갔지만 법적 위임인이 아니라 심의에는 들어갈 수 없었어요. 혼자 심의실에 들어가 질문에 답하다가 결국 울고 말았어요. 8월 26일 산재 인정 통보를 받았어요. 산재가 인정된 것보다 회사 온라인 소통방을 나가는 게 제겐 더 큰 위안이었어요. 더 이상 그곳의 메시지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조금 편해졌거든요. 저는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왔어요. 대한민국과 대한민국의 법을 믿었고, 아들에게도 한국 유학을 권했어요. 하지만 저는 비자와 일자리를 잃을까 봐 하고 싶은 말도 마음속에 묻어두고 살았어요. 지금도 오른쪽에 마비 증상이 나타나 물건을 놓치거나 말이 끊길 때가 많아요. 숨기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저와 같은 이주여성들이 더 이상 두려움 때문에 부당한 대우나 성폭력까지 숨기고 참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용기를 냈어요.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법에 따라 정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같은 피해가 반복되지 않고, 국적이나 성별, 체류 자격에 상관없이 '나도 목소리 낼 수 있다'라는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지금까지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함께해 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 일터 10월호에도 실립니다 바다이야기 무료머니 .이 글을 쓴 김사부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입니다.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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