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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성원성 작성일26-09-28 22:07 조회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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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혼란의 이틀 8월 7~8일 역사의 향방을 바꾼 ‘결정적 사흘’을 들여다봅니다. '역사 빌런'들의 오만·오판·편견이 나라의 운명에 얼마만큼 큰 해악을 끼치는지를 보기 위해, 운명을 바꾼 결정적 72시간에 돋보기를 들이댑니다. 그 첫번째 순서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와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 투하 사이, 일본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로버트 오펜하이머, 첫 핵실험 성공 직후 1945년 7월 16일 미국 네바다주에서 실시된 첫번째 핵실험 장면. 초대형 버섯구름이 피어오르고 있다. 미 에너지부 연관기사 • 히로시마에 핵 떨어진 날, 히로히토는 일본 국민보다 소련을 더 걱정했다 #7: 진주만을 잊지 말라 단 한 발의 폭탄으로 히로시마를 초토화시킨 미군은 곧바로 두 번째 강펀치를 준비했다. 별도의 대통령 명령은 필요 없었다. 첫 폭탄이 너무 비인간적이라 공격을 멈춰야 하나, 그런 고민도 할 필요 없었다. 폭탄을 계속 떨구라는 명령은 이미 내려와 있었고 일본이 항복하지 않으면 핵공격은 멈추지 않는다. 1945년 7월 25일 미 합동참모본부가 전략공군사령관 칼 스파츠에게 하달한 명령서를 보면, ①히로시마 고쿠라 니가타 나가사키 중 한 곳에 폭탄을 투하하고 ②준비가 끝나는 대로 즉시 추가 원폭을 투하하도록 했다. 추가 공격 시기는 사령관 스파츠의 재량에 달렸다. 1945년 7월 25일 미 합동참모본부가 육군항공대 전략폭격사령부에 하달한 원자폭탄 투하 명령서.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다음날인 8월 7일, 미 전략공군사령부가 위치한 괌에서 원폭 일정을 결정할 핵심 장교 다섯 명이 모였다. 먼저 전략공군사령관 스파츠 대장. 언제 어떻게 원폭을 떨어뜨릴지 구체적 결정의 최종 권한이 이 사람에게 있다. 두번째 인물은 일본 공습을 책임지는 21폭격기사령부 사령관 커티스 르메이 소장.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며 일본 초토화를 정당화한 인물이자, 나중에 공군참모총장 시절 “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만들겠다”고 큰소리친 전략폭격 신봉자다. 그리고 히로시마 폭격에 직접 나섰던 티비츠 대령(기장)과 파슨스 대령(무기 담당). 마지막으로 핵폭격 조정 업무를 맡은 윌리엄 퍼넬 해군제독이다. 여기서 중요한 결정이 내려진다 상품권릴게임 . 원래 8월 11일 예정됐던 두 번째 원폭 투하가 8월 10일로 하루 앞당겨졌고 다시 8월 9일로 빨라졌다. 일본 지역에 장기간 짙은 구름이 낄 것이란 예보가 발령돼 있어, 일정을 당길 필요가 있었다. 이 무렵 미군은 세번째 원폭 투하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목표 지。은 바로 도쿄였다. 히로시마 투하에도 일본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미국은 수도에 직접 위협을 가해 무조건 항복을 이끌어내려 했다. 당시 전략폭격 최고 책임자였던 스파츠 대장은 육군항공대사령관(공군참모총장) 헨리 아널드 원수에게 전문을 보내 “다음 표적으로 도쿄를 강력히 추천한다”고 건의했다. 전쟁 후인 1964년 미공군역사연구소와의 인터뷰에서 스파츠는 “만일 도쿄에 떨어뜨린다면 외곽에, 이를테면 도쿄만에 투하할 생각이었다”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폭격 사이에 이런 제안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이제 일본이 두 번째 원폭 세례를 피할 여유는 48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만약 이걸 막지 못한다면…. 세 번째 폭탄이 수도 도쿄에 떨어질 것이다. 시간이 없다. 1945년 3월 미국의 도쿄 대공습 이후 폐허가 된 도쿄 시내의 모습. 미군 항공기가 북쪽 방향에서 남쪽으로 찍은 사진이다. 사진 오른쪽 수로는 스미다강이고, 하단부는 파괴된 료고쿠 역의 모습이다. 돔 모양의 건물은 스모 경기장으로 쓰였던 료고쿠 국기관이다. 미 육군항공대 촬영 #8: 일본 군부의 현실부정 그러나 일본 수뇌부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먼저 군부의 상황부터 보자. 군부부터 살펴보는 이유는 당시 내각이 전쟁 통제권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전쟁은 천황 히로히토의 뜻을 받든 육군과 해군의 의지대로 수행되는 중이었다. 원폭으로 추정되는 폭탄이 떨어져 병력 2만 명이 사망했다면 당연히 군부가 초비상 상태에 들어가 있었을 것 같지만, 육군은 이상하게도 통상 보고 체계를 유지했다. 남아 있는 기록으로 볼 때 육군참모본부 수뇌부가 비로소 움직인 시.은 8월 7일 새벽이 되어서였다. 육군 2인자인 참모차장 가와베 도라시로 중장은 일기에 “히로시마시 전체가 폭탄 한 발에 순식간에 파괴됐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기록했다. 그때 가와베는 히로시마를 강타한 폭탄이 원폭임을 직감했다 모바일 바다이야기 가상 계좌 . 육군 수뇌부에 보고가 들어간 것은 이미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 성명’이 발표된 뒤였다. 트루먼 성명, 현장 부대 보고 내용으로 볼 때 원폭이 거의 틀림 없어 보였다. 원폭은 일본이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궁극의 무기. 답은 무조건 항복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일본 육군 수뇌부는 궁지에 몰린 꿩이 머리만 수풀에 처박는 것처럼 대응을 미루며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8월 7일 육군은 “소수의 B-29가 새로운 형태의 폭탄을 이용해 상당한 타격을 입혔고 세부 사항은 조사 중”이라는 대국민 성명만 발표했을 뿐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일본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 위키미디어 커먼즈 #9: 정부의 무능 육군대신(현역 육군대장) 아나미 고레치카의 대응은 더 가관이었다. 8월 7일 오전 스즈키 총리 소집으로 열린 비상각료회의(히로시마 폭격 후 처음)에서, 아나미는 “트루먼 성명이 기만책일 수 있고 핵폭탄이란 증거가 없다”며 강화 가능성을 일축했다. 빨리 전쟁을 포기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했던 그 절박한 순간, 아나미와 육군은 무의미한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런 군부의 독단에 치여 일본 정부가 내놓은 조치는 겨우 핵과학자와 일부 장교로 구성된 현장.검단을 히로시마로 보내는 것뿐이었다. 나중에 밝혀진 충격적 사실이 있다. 총리 앞에서 열렬히 원폭의 존재를 부정했던 그날, 아나미는 일기에서 미국의 원폭 사용을 인정했다. 나라가 패망에 이르렀음에도 자기 이익 때문에 전쟁을 멈추지 않았던 군부, 이런 군부의 폭주에 감히 제동 걸 수 없었던 정부, 군부의 과잉 충성을 교묘히 이용해 자기 살 길만 찾았던 히로히토. 이들의 만용·무능·비겁으로 인해 일본은 멸망의 길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었다. 일본은 신들이 보호하는 특별한 나라라는 생각(신국사상), 일본군을 당할 군대는 없을 것이란 오만, 미국이 설마 원폭을 사용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착오, 정부는 무너져도 천황제는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자만. 카드의 집처럼 허약하게 쌓아 올린 이 모든 환상이 미국의 무자비한 공격 앞에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일본 수뇌부는 심각한 ‘인지 부조화’에 빠졌다. 일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 미 육군 #10: 도고 시게노리 알라딘다운로드 이 집단 착란 속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정신을 차렸던 각료가 있었다. 그는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이다. 지금부터 그 과정을 세밀하게 살필 예정인데, 1945년 8월 일본의 무조건 항복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도고다. 도고는 이 전쟁에 승산이 없다는 걸 진작 눈치챘고, 군부의 본토결전론(미군 상륙시 최후까지 저항해 최대한 피해를 준다)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도고가 항복을 생각하기 시작한 시.은 1945년 5월 나치독일의 패망 직후부터다. 유럽에 몰려 있던 미국·소련·영국의 대병력이 이제 다 태평양으로 쏟아져 들어올 텐데, 일본 혼자 다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총리, 외무대신, 육군대신, 해군대신, 육군참모총장, 해군참모총장 등 6명으로 구성된 최고전쟁지도회의(최고 결정 기구)에서 도고는 “미국에 휴전회담을 제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도고의 제안은 군부의 반대로 거부됐고, 그러다가 일본은 7월 26일 연합국 3개국(미국·영국·중국)으로부터 무조건 항복 최후통첩(포츠담 선언)을 받게 된다. 1945년 7월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 선언에 참석한 영국 미국 소련 정상. 앞줄 왼쪽이 클레멘트 애틀리 영국 총리, 가운데는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오른쪽은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 뒤에 선 남성(콧수염)이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다. 위키미디어 커먼즈 포츠담 선언 당사국에 소련이 들어가 있지 않았던 것은 그때까지 소련과 일본이 불가침조약(1941년)에 따라 중립 상태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도고를 제외한 최고전쟁지도회의 5인은 ‘소련이 중재하는 휴전’이라면 받아볼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국제정세에 정통한 도고는 소련에 나라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육군대신 아나미는 “미국과 소련의 분열을 이용하자”고 했고, 해군대신 요나이 미쓰마사는 “소련과 순양함·석유를 맞바꾸면 어떠냐”며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었다. 과거 항상 선전포고도 없이 남의 뒤통수를 치던 일본은 이번엔 도리어 소련에게 뒤통수를 맞게 된다. ※ '제3장: 결단의 날 8월 9일'로 이어집니다. ※ 이 기사는 한국일보의 프리미엄 기사입니다. 더 자세한 기사 내용은 한국일보닷컴에서 로그인 후 무료로 보실 수 있습니다. 링크를 복사해 주소창에 붙여넣으세요. 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A0003813 이영창 논설위원 본의 무조건 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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