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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성원성 작성일26-08-13 01:13 조회23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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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02 / Day 11-24
숲속의 어느 캠프사이트와 내 텐트
Day 11 보이지 않기에 나아갈 수 있었던 밤
AT에는 200개가 넘는 Shelter가 있었고, 저마다 이름과 개성이 있어 찾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하지만 이곳 PCT는 Shelter가 없다. 매일 밤 직접 텐트를 쳐야 하는데, 정해진 이름조차 없는 캠프사이트가 태반이다. 일기에는 그저 오늘 걸은 거리(mile)만 적어 넣을 뿐이지만, 마음 같아서는 지나온 자리마다 이름을 하나씩 붙여주고 싶었다.
오늘도 비로 하루를 시작한다. 날씨는 내 능력 밖의 영역이기에 일찌감치 마음을 비웠다. '올해는 이곳에 물이 많이 필요한가 보다'라며 쿨하게 받아들인다. 비에 젖은 길, 질척거리는 신발 속의 발. 이미 AT에서 단련된 감각이라 걷는 데는 거침이 없다. 오후 1시쯤 되자 거짓말처럼 파란 하늘이 열리며 태양이 얼굴을 내밀었다. "안녕, 솔라." 그 인사가 눈물겹게 고마워 양지바른 곳에 앉아 간식을 먹으면서도 한참 동안 하늘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진짜 시련은 그 뒤에 찾아온 '레드 패스(Red Pass)'와 '화이트 패스(White Pass)' 구간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눈 덮인 경사면은 상상 이상으로 가팔랐다. 첫 번째 난관인 30m 구간. 발앞꿈치로 눈을 힘차게 걷어차 평평하게 만들며 한 발씩 내디뎠다. 왼팔을 뻗으 면 바로 옆 설벽이 닿을 정도의 아찔한 경사. 기록을 위해 카메라를 꺼내고 싶었으나 도저히 엄두가 안 났다. 지금은 생존이 우선이었다. 아이스엑스도 없이 내 몸무게와 배낭을 작은 아이젠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등줄기를 서늘하게 했다.
300m처럼 느껴졌던 30m를 지나 코너를 도니, 이번엔 50m 길이의 빙판 경사가 나타났다. 서너 발 내디뎠을까,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뒷걸음질로 돌아 나왔다. 자만할 일이 아니었다. 결국 눈이 없는 아래쪽 흙바닥까지 수십 미터를 빙 둘러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우회로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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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30m 구간에서는 죽을 힘을 다해 발차기를 했다. 한 걸음 내딛기 위해 눈을 열 번씩 걷어 찼다. 그렇게 사투를 벌인 끝에 무사히 구간을 통과해 저녁 6시, 캠프사이트에 닿을 수 있었다.
밤 8시가 넘은 시각, 어둠 저편에서 누군가 늑대울음 같은 신호를 보내왔다. 우리 멤버들임을 직감하고 텐트 밖으로 뛰어나가 더 큰 신호를 보냈다. 그들이 멀리서도 보고 찾아올 수 있게 장작을 더 모아 불을 키웠다. 밤 9시가 넘어서야 헤드램프를 밝힌 6명의 동료가 그 험한 구간을 넘어 도착했다. 종주 시작 후 가장 짜릿하고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서로를 껴안으며 이 대단한 완주를 축하했다. 어두워서 밑이 보이지 않았기에 오히려 발 앞의 발자국만 보며 올 수 있어 덜 무서웠다는 그들의 말. 듣고 보니 꽤 일리가 있었다. 때로는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 용기의 근원이 되기도 하는 법이니까.
아슬아슬 긴 눈 경사면
Day 12 대자연이 빚은 조각품 사이를 걷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숨이 멎을 듯한 비경이 연이어 펼쳐졌다. 인간이 제아무리 정교하게 조각한들 대자연이 빚어낸 이 웅장함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나는 걷는 내내 PCT를 향한 사랑을 아낌없이 표현했다. 맑게 갠 날씨는 덤이었다. 기분 좋게 땀을 흘리고, 며칠간 눅눅했던 장비들을 햇볕에 바짝 말렸다. 맑은 계곡물로 목을 축이고 몸을 적시는 매 순간이 그저 행복하고 감사했다.
현재 나는 PCT 전체 구간 중 가장 험난하다는 워싱턴 구간을 통과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가장 큰 장애물은 역시 '눈'이었다. 쓰러진 나무들은 이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고, 이따금 나타나는 1,500~1,800m급의 가파른 오르막도 견딜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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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지난 AT 종주 때 겪었던 메인주와 뉴햄프셔주의 악명 높은 구간들과 비교하면, 이곳은 오히려 수월하게 느껴질 정도다.
'앞으로 펼쳐질 오레곤과 캘리포니아는 얼마나 더 아름답고 편안할까?'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시에라 산맥의 이른 눈만 피할 수 있다면, 이론상 남은 구간은 지금보다 쉬워질 것이다. 하루에 40~50km씩 몰아치듯 걷는 종주자들이 왜 존재하는지 새삼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긴장의 끈을 늦추어선 안 된다. 부상은 늘 마음이 놓이는 쉬운 길에서 불쑥 찾아오는 법이니까. 오늘 계획했던 캠프사이트까지 남은 거리는 단 1.6km. 나는 바닥에 뒤따라올 동료들을 위해 흙 위에 짧은 응원의 메시지를 남겼다. 'One more mile!'
꼭꼭 숨은 PCT마크
Day 13 우체국 레이스와 '하이커 헤븐'에서의 안식
운명의 금요일이다. 오늘 들어가는 마을 스카이코미시(Skykomish)의 우체국은 오후 3시 반에 문을 닫는다. 지금 있는 곳에서 마을까지는 약 26km. 만약 그때까지 도착하지 못해 내 음식 박스를 찾지 못한다면, 월요일까지 꼬박 사흘을 기다려야 하는 재앙이 닥친다. 무조건 달려야 했다.
새벽 5시 반, 누구보다 빠르게 캠프사이트를 나섰다. 나보다 마 음이 더 급했는지 동료 세 명은 이미 어둠을 뚫고 출발한 뒤였다. 다행히 큰 오르막이 없는 평탄한 길이었지만, 방심할 순 없었다. 언제 또 잔인한 쓰러진 나무들이 길을 막아설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눈을 사로잡을 만한 풍경도 나타나지 않아 오로지 하이킹에만 집중하며 속도를 높였다.
트레일이 끝나는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 예상보다 일찍 도착해 안도했지만, 진짜 고비는 지금부터였다. 여기서 마을까지 약 32km를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해야 했다. 오늘 나와 함께 걸은 독일 소녀 '메기(이제는 '할리우드'라는 트레일 네임이 생겼다)'는 히치하이킹이 처음이라며 잔뜩 긴장한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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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종주의 경험을 살려 노련하게 히치하이킹의 기술을 전수했다.
남자는 선글라스를 벗고 환하게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워야 한다. 필요하다면 춤이라도 춰서 '나는 아주 행복한 하이커'임을 온 몸으로 증명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반면 여자는? 그냥 서 있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농담 같지만 엄연한 트레일의 법칙이다. 하지만 할리우드의 덕을 좀 보려던 내 계획과 달리, 무려 40분이나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보통 히치하이킹은 하이커들의 사정을 잘 아는 인근 주민들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주말이 시작되는 시.이라 도로는 외지에서 온 방문객 차량들로 가득했다. 여행자들은 낯선 이들을 선뜻 태워주지 않는다. 주민들의 차를 간절히 기다리며 도로 위에서 보낸 40분은 트레일을 걸을 때보다 더 애가 탔다.
우여곡절 끝에 우체국에서 식량 박스를 무사히 찾고, 다시 차를 얻어 타 트레일엔젤 집에 도착했다. 이곳의 주인 안드레아(Andrea)는 2003년부터 13년째 하이커들을 위해 집을 내어주고 있었다. 은퇴 후, 길가에 갈 곳 없이 앉아있는 하이커들을 집으로 데려온 것이 시작이었다고 하는 그녀는 이제 하이커들의 '엄마'로 불린다.
차고를 개조한 아늑한 숙소와 빨래 시설, 그리고 마음껏 텐트를 칠 수 있는 넓은 마당까지. 이곳은 하이커들의 천국이었다. 모든 비용은 자발적인 기부로 운영되는 이 따뜻한 공간에서 우리는 내일 하루 온전히 쉬어가는 '제로 데이'를 보내기로 했다. 치열했던 13일간의 워싱턴 구간, 누적 거리 약 303km 지。에서 나는 비로소 팽팽했던 긴장을 내려놓고 깊은 휴식에 든다.
음식박스를 받고 히치하이킹 시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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